이제껏 교회 생활하면서 교회 내 분열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적이 서너 번 있다. 목사 청빙 문제,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의 갈등, 예배당 신축 등의 문제를 놓고, 교인들이 두 패로 갈려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한다. 심하면 법정 소송으로 번지기도 한다. 한솥밥 먹던 교우가 졸지에 적으로 변하고 신앙이 약한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고, 민감한 청소년은 일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으며 하나님은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지옥이 따로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 신앙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목사의 설교에서는 매번 죄 회개를 촉구하고 기도할 때는 빼놓지 않고 죄 용서를 간구한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대전제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죄를 가장 철저히 인정하는 사람이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성도들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성도들이 두 패로 짝 갈라져, 모든 악의 원인은 상대 진영에 있고 자신은 죄에서 면제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 진영 내부에서 전파되는 편향된 팩트와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정당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감정적 흥분 상태가 지속돼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이런 상태로 수년을 지나게 되면 교회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은 하나도 없고, 은혜가 필요 없는 의인들만 남게 된다. 교회가 망가지는 것이다.
이 원리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보자.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진영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악마화한다. 자신이 속한 진영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 있고 따라서 자신도 선하다고 생각한다. 각 진영의 선봉에는 정당(政黨)이 있고 시민사회 단체가 호위하고, 신문·방송·인터넷 매체 등이 나팔수 노릇을 한다. 가장 공정해야 하는 사법기관도,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교육계도,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인과 예술가의 영혼도, 가장 초월적이어야 할 종교도, 거리낌 없이 노골적으로 양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진영논리가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다.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외교 문제도, 미래 인류의 사활이 달린 에너지 정책도, 압사 사건의 책임 규명도 모두 진영논리로 환원된다. 객관적으로 따져보거나 차분히 머리를 맞대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는 내부 총질이나 하는 자로 낙인찍히고, 범죄자는 진(陣) 깊숙한 곳에 숨어 보호받는다. 인문학적 성찰이니 역사적 책임이니, 가난한 이웃과의 공감 같은 것은 이제 수사(修辭)에서조차 사라졌다.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을” 뿐이다.(호 4:2) 뻔한 플롯의 지루한 복수극을 언제까지 참아내야 하나.
중요한 건 진영논리가 우리 영혼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천하를 얻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은 그 영혼들이 모여서 형성된 공동체다. 우리 사회가 법과 제도에 의하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들이 만나고 환대하고 교제하고 연대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유교식으로 말하자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하여 죄를 짓고 있다는 의식,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는 부채의식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진영논리는 우리 영혼을 잃게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탄의 고안물이다. 2022년 대한민국은 이렇게 망가졌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