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일컫는 모세오경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경전이다. 중요하고도 거룩한 선집이다 보니 그 끝이 아름답고 대단할 것 같은데 정작 그렇지는 않다. 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아직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모세가 가나안이 내려다보이는 모압 땅에서 죽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신 34:1~12)
오경의 뼈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라면 그 결말에는 약속이 성취되는 가나안 입성 장면이 포함돼야 할 법하다. 그렇기에 일부 성서학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이야기인 여호수아를 오경에다 합친 육경이 구약성서의 근본 본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의 복잡한 이론을 제쳐두더라도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인간 본성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잘 사는 이야기까지 들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잠깐! ‘약속과 성취’라는 구도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왜 애초에 여호수아를 포함한 육경을 만들지 않았을까. 가나안 정착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특히 중요할 텐데, 왜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만 토라라 부르며 이 다섯 권의 책에 더 큰 의미 부여를 했을까.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소박한 낙관주의와는 다른 성서의 심오한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경이 이스라엘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문서임을 고려하면, 정착 생활이 보장하는 안정과 풍요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비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이스라엘을 고대 근동의 다른 부족이나 나라와 차별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노예들을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고 이집트 대신 미지의 땅으로 향하던 믿음이었다.
약속이 어느 한 시점에 특정 장소에서 완전히 이뤄졌다면, 그 약속은 더 이상 약속으로서 의미도 힘도 지니지 못한다. 구조적으로 오경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제외함으로써, 약속의 성취 자체가 아니라 약속에 대한 희망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형성함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이든 교회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 역시 다시 오시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은가.
오경에 나오는 땅 없는 이스라엘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경계할 것은 삶이 안정적이고 조종 가능하다는 환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불안하다. 아무리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더라도 삶의 불안을 완전히 달랠 정도의 안정감을 우리는 결코 획득할 수 없다. 이 같은 자명한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 삶의 안정과 풍요를 과하게 추구하다가는 자아에 대한 망상에 쉽사리 사로잡히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의 삶의 기본 조건과 행복을 제물로 삼을 위험이 있다.
대개 연말이면 서로에게 더 넉넉하기 마련인데, 2022년이 저무는 이때는 왠지 그러한 훈훈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도 혼란하고 경제도 침체했고 삶은 불확실한 데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해서인 것 같다. 삶이 불안정하고 수수께끼처럼 여겨질 때,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해피엔딩을 더 간절히 원하기 쉽다.
이런 상황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오경의 구조가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는 장면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가 아니라, 이전 모습에 삶의 까칠한 본성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더 잘 드러난다.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채 찝찝하게 마무리되는 오경의 결말을 되새기며 삶이 부조리하고 힘들더라도, 아직은 완전히 현실화하지 않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해를 맞이하길 바란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