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사는 분이 수수팥떡 한 접시를 들고 연구소를 방문했다. 얼마 전 아빠를 잃은 네 살 된 손주를 위해 지방에 계신 할머니가 손수 빚은 생일떡이라고 했다. 떡을 입에 넣는 순간,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마음이 보였다. 따뜻한 떡 한 조각을 받아든 이웃은 부모 마음이 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는 것을 옛 어른들은 경험치로 알았던 것일까. 아이가 스스로 설 때까지 이웃 모두가 부모의 따뜻한 시선이 돼 지켜주는데, 어떤 아이가 쉽게 넘어지겠는가. 모든 이웃을 부모로 만드는 떡이라니 기적이 따로 없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걸 보면 떡 나눔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미신이 아니었다. 지혜로 지은 삶의 양식이고 이야기로 전달되는 인생 과학이었다. 어쩌면 이웃이 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행복 울타리가 아닐까 싶다. 아니 행복 울타리가 돼야 진정한 이웃일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모든 아기는 그리스도로 태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땅에 보내진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니 미래를 구할 희망으로 함께 잘 키우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듯이 사람을 키우는 일은 부모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전체가 온 힘을 기울이고 다양한 사람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지역공동체가 완전체로 협력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경쟁이 만능이 된 우리 사회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골목마다 들어선 교회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이웃이 되는 일은 오늘의 교회에 늘 버거운 도전이다. 사랑은 실천이며 그 길만이 자신의 제자임을 드러낼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도 효과가 없다. 매일 하나님을 찾지만 정작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상처 입은 이웃은 애써 외면하고 번지수를 잘못 찾아 되레 더 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진 한국사회를 흔들어 깨운 청년노동자 전태일. 50년 전 그 어머니가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내 아들이 죽은 것에 관해서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배워서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도리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직도 평화시장 같은 곳에서 말할 수 없이 고생하는 저 어린 것들은 언제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태일만 그의 아들은 아니었다. 공장 소녀들 모두가 그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청년노동자가 홀로 짊어진 고통의 무게에 관심 두지 않았다. 되레 자살이라는 죄명을 씌워 장례예배를 거부했다.
반대의 선택도 있었다. 국가 권력이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하자 교회는 ‘거교회적인’ 대규모 기도회를 열고 젊은이들의 등을 밀어 전쟁터로 향하게 했다. 친구를 위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파병부대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전사자로 돌아온 이들에겐 그리스도의 사랑 운운하며 어머니로 자처했고 모자결연도 선보였다. 전사자 대부분이 부모 형제가 없는 이들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한마디로 부모 형제가 없는 스무 살 젊은이들을 교회가 ‘위대한 사랑’으로 만들어 남의 전쟁터로 내몰았다는 말 아닌가. 일제 말기에도 교회는 똑같은 말을 했다. 요즘이라면 한마디로 일갈했을 것이다. “니가 가라 하와이….”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극히 작은 자들’의 이웃 되기, 행복 울타리 되기를 포기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귀하디귀한 청년들의 떼죽음을 보고도 교회는 한마디 말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새로 맞은 2023년, 교회는 솔로몬의 시험대 위에 섰다.
하희정(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