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을 위해 너의 신앙을 버릴 수 있는가?’ 신부 로드리고에게 던져진 질문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것이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순교자가 되느냐 배교자가 되느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닌 신자들이냐 예수냐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신자들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를 물었더라면 답이 그리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신앙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죽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로드리고는 오랜 고뇌 끝에 스스로 배교자가 되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후미에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목판 앞에 선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말도 안 되는 선택을 그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예수께서 깊은 침묵 한가운데서 말씀하신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기독교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침묵’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아시아에서는 웬일인지 기독교를 지키는 것이 곧 예수를 지키는 것이라는 서구교회에서 배운 공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 공식을 되뇌일수록 마치 신앙의 크기를 달아보려는 듯 곤혹스러운 질문만 들려왔다. ‘신자들을 위해 너는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가?’ 너의 신앙이 정말 예수를 위한 것이 맞느냐 묻는다. 도망칠 수도 없는 고독한 질문 앞에서 두 사제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예수께서 극진히 사랑한 사람들의 손을 차마 놓을 수 없어, 스스로 기꺼이 덫인 줄 알면서도 유다의 멍에를 뒤집어쓴 스승 페레이라. 그리고 배교자가 되는 선택임을 알면서도 스승의 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로드리고.
이는 사랑의 끝판왕 그리스도를 감히 따르겠다고 나선 크리스천에겐 지독한 딜레마다. 더욱이 사제라면 이보다 더 잔인한 선택지는 없지 싶다. 페레이라와 로드리고의 고통은 곧 예수의 고통이었고, 예수의 고통은 곧 하나님의 고통이었다.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초상을 지키라 말하는가. ‘너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얼굴쯤이야 천 번 만 번을 밟혀도 좋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얼굴을 수천 번을 밟아서라도 제발 살아다오.’ 절규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길고 깊은 침묵 속에서 끝까지 답을 기다린 신자들에게 두 사제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답이었다.
욥도 고통 한가운데서 신의 침묵에 질문했다. 예수께서도 고통 한가운데에 서서 신의 침묵에 질문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고통 한가운데서 겪은 공통된 하나님의 경험, 그것은 바로 ‘신의 침묵’이었다. 아무리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불러도 답이 없다. 그러나 또한 이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모두 한 가지 답을 얻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한가운데를 지나는 이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나님조차도 그 죽음의 고통을 함께 견딜 뿐이라고. 인간의 고통은 곧 신의 고통이니, 침묵이 가장 큰 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모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죽음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고통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나약함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더 많이 사랑한 이가 약자가 되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곧 침묵의 시간 사순절이 시작되는 2월이다. 우리는 곤혹스러운 질문들과 다시 마주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가. 사랑의 보루라 외치는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위해 어디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가. 예수께서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차마 놓을 수 없어, 교회법 앞에서 스스로 약자가 되고 교리 앞에서 스스로 죄인이 된 이들의 깊은 고뇌와 고통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하희정 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