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시간 중에도 재수 생활은 계속됐다. 재발한 결핵 때문에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도 힘들었을 때였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대학에 입학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후회의 마음이 들었다. “의대를 지원하지 않았으면 나도 대학생이었을 텐데”하는 자책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한 시절이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지금 내 명함엔 부산의대 교수, 부산의사회장, 그린닥터스 재단 이사장 등 10개 넘는 직함이 있다. 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갔기에 가능한 직함이다.
그리고 대한결핵협회장도 있다. 어릴 때 결핵을 앓던 내가 결핵협회장이라니. 인생역전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핵 투병 경험이 있으니 누구보다 치료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았다. 장기간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질병이었다. 그래서 결핵 예방을 위한 홍보대사도 자처했다. 지면을 빌어 간단히 설명하자면 결핵의 초기 증상은 기침 가래 미열 등 감기 증상과 비슷해 초기 발견이 쉽지 않다. 이유 없이 기침 가래가 2주 이상 지속되면 결핵으로 의심해 봐야 한다. 가장 확실한 진단 방법은 객담(가래) 도말검사와 배양검사다. 결핵으로 진단되면 항생제의 일종인 항결핵 약제를 먹어야 한다.
안과 전문의인 내가 결핵 퇴치에 나선 게 단순히 내가 어릴 적 결핵을 앓아서만은 아니다. 2005년 북한 개성병원에서 북한의 결핵 환자들을 보고 나서다. 세상은 약으로 결핵을 완치할 수 있게 됐는데 여전히 약도 먹지 못해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는 북한의 사람들을 봤다. 결핵이 없는 한반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결핵 발생률이 1위였다. 북한을 제외한 수치가 이 정도니 남북을 모두 합하면 우리나라는 결핵 후진국이 될 게 뻔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결핵 문제를 우리가 결핵 치료기술과 항결핵제로 푼다면 북한과 닫힌 문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핵 퇴치에 늘 목말랐던 나는 결핵협회 이사와 부회장직을 맡았고 2013년 회장직까지 맡게 됐다. 2년간 28대 회장으로 일했고 2019년엔 대한결핵협회 복십자대상 공로부문도 수상했다.
전국에 분산돼 있던 결핵 퇴치사업과 연구 관련 민간단체를 통합해 ‘결핵 통합일원화위원회’를 만들었고 지역별 맞춤 사업을 위해 6개 지회·6개 지사 체제를 12개 지회 체계로 전환했다. 복십자의원의 정상화와 경쟁력 강화도 모색했다. 복십자의원은 1955년 9월 서울 중구 회현동 한켠에서 대한결핵협회의 부설 진료소로 시작했다. 협회의 법정기부금단체 지정도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회장으로 있으면서 평소 품고 있던 꿈 중 하나인 황해도 해주에 ‘코리아 결핵 병원’을 짓겠다는 제안도 했다. 해주는 캐나다인 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병원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한 곳이다. 우리나라 결핵 퇴치 사업에 나선 홀 박사처럼 나도 북한의 결핵 치료에 나서겠다는 꿈을 키웠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