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내가 누구인가



종교를 영어로 religion이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religare인데 의미는 ‘거슬러 올라가 묶는다’란 뜻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근원을 캐어 거슬러 올라가 나를 하나님께 묶는 훈련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합일된 체험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혈연관계를 확인해 그를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살아야 한다. 동물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물은 백 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진보와 발전이 없다. ‘내가 누구인가’는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질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사는 사람은 신앙 이전에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인 노릇을 할 수 있을까. 평생을 교회에 다녔어도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았다면, 마당만 밟고 다닌 사람처럼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나’를 아(我)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我)는 욕심 덩어리 상태이다. 소유욕 생존욕 소속욕 명예욕 식욕 성욕 성취욕 종족보존욕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벗어난 ‘나’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무아지경이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고 세상도 없고 욕망도 없는 상태이다. 이것을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눈으로 보이는 허상의 ‘나’는 가아(假我)이고 무아의 경지에서 만나는 본질적인 ‘나’는 진아(眞我)이다. 진아를 찾기 위해서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항상 질문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듯 세상의 종교도 부단히 자신을 향한 질문에 정진한다. 하물며 예수 믿는 자들이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회 생활에 문제가 많다. 교회의 가르침에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점검하며 살라는 주문이 부족하다. 우리의 교회 생활이 너무 행사 위주로 이어지고 예배나 음악이나 기도가 요란하기만 하여 조용한 구석이 없다.

신앙은 가아(假我)를 죽이고 진아(眞我)를 찾는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자신을 점검하며 살았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고전 15:31) 그 결과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자아를 발견했다.(딤 1:15) 신앙인으로서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 나를 세워보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감투를 쓰고 나지 않았고 재물을 들고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고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쌓인 욕심과 권모술수, 시기와 질투와 편가르기와 자리다툼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느 사이에 교만으로 목이 곧아지고 위선으로 거짓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을 상실한 것인가. 이 모든 병리 현상은 “내가 본래 어떤 존재였나”를 묻지 않고 살아온 결과다. 즉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십자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 후 철학의 기본 질문이 됐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주의와 사상이 생겨났다. 종교학적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나’이다. 종교는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가”를 묻게 만들어야 한다.

창세기에는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이 나온다.(3:9) 여기서 “어디 있느냐”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신앙인은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며 살아야 한다.

문성모 목사(한국찬송가개발원장)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