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근 (5) 의대 입시 준비하며 시작된 부산생활, 이젠 ‘제2의 고향’

정근 원장은 1979년 부산의대에 입학한 뒤 40년 넘게 부산에 살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 있는 무지개다리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1978년 부산에서 재수 생활을 하면서도 ‘서울에 가야겠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생각을 바꾼 건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장남인 나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을 고려해야 했다.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인 부산대학교 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더구나 도시 생활은 촌사람에게 낯설었다. 첫 대입 때 잠깐 경험한 서울 사람은 깍쟁이처럼 여겨졌고 ‘나는 여기서 못 살겠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다.

나의 첫 부산살이는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시작됐다. 투병과 공부를 병행했고 드디어 부산의대에 입학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의대 입학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옥수수죽을 먹기 위해 초등학교에 일찍 입학하고 제대로 먹지 못해 결핵 투병이 힘겨웠던 나는 의사가 돼 돈 한 번 펑펑 쓰면서 살고 싶었다. 은행에 100억원 쯤 넣어두고 이자만 받고 사는 인생을 꿈꿨다. 입학 전부터 명의가 돼 돈을 많이 벌겠다는 각오를 다진 덕에 입학 후엔 죽어라 공부했다.

물론 의대에 들어갔다고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형편이 나아진 건 없었다.

부곡동 이모 집에 잠깐 얹혀살다가 입주 과외에 나섰다. 공부는 공부대로 하면서 생활비도 직접 벌어야 했다. 입주 과외는 돈도 벌면서 숙박까지 해결해 주니 나에겐 최적의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가 생활에 도움은 됐지만 삶은 늘 불안했다. 가르치는 아이가 바뀔 때마다 나는 짐을 싸야 했다. 두 번의 입주 과외, 하숙집을 바꾸면서 싼 짐이 열여덟 번이나 됐다. 부산대 캠퍼스가 있는 장전동, 부산의대가 있는 아미동, 동대신동 등은 물론 부산 변두리부터 산복도로까지 안 가본 데가 없었다.

포장이사가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 이사는 쉽지 않았다. 짐이 적어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책이며 냄비 그릇 등 가재도구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서 ‘빵빵’ 거리는 경적 소리와 “어이 학생, 비켜”라는 운전자의 호통을 들으며 아슬아슬하게 다녀야 했다.

도움을 준 건 나처럼 손수레로 이삿짐을 나르던 고교 동창생들이었다. 이사하는 데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렸다. 산복도로부터 바다가 보이는 남천동까지 부산 곳곳을 이사하며 부산의 속살도 여실히 봤다. 겉모습은 거칠어도 속은 따뜻한 부산의 바다 사나이, 길에서 채소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부산 아지매, 산비탈 판잣집에 살며 수십 명이 공중화장실 하나로 버티던 아미동 사람들…. 모두가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 좋았다. 통영 때 처음 만난 바다가 올망졸망한 섬들로 아기자기했다면 부산의 바다는 이곳을 삶터로 살아가는 사람들 덕에 활기 넘쳤다. 자갈치 아지매의 수다처럼 유쾌하고 정겨웠고 태평양의 깊고 장대함에 마음이 탁 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부산 생활은 이제 40년을 훌쩍 넘겼다. 누군가 나에게 ‘너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지리산의 정기 어린 산청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산의 바다를 보며 원대한 꿈을 키웠다고.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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