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 입학한 나는 열심히 생활비를 벌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다. 데모에 앞장서고 저녁이면 의대 동기들과 술 한 잔을 즐겼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현장에도 있었다.
그런 내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서다. 첫 만남은 1980년 의예과 2학년 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휴교한 사이 단짝 친구의 달라진 모습을 봤다. 나처럼 수줍음도 많고 조용하던 단짝 친구가 적극적이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 됐다. 바뀐 이유를 물었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성경공부’였다.
미국인 선교사와 같이 다니니 달라지더라는 친구의 말이 궁금하기도 했고 영어공부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친구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 바로 기독동아리 네비게이토 선교회였다. 네비게이토는 현재 110여개국에 있는 선교단체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법, 말씀을 암송하는 법, 균형 있게 기도하는 법, 복음을 전하는 법 등을 알려준다. 물론 내 삶이 당장 달라지진 않았다.
학교 문이 닫혀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시는 경남 남해 실천초등학교로 갔다. 그러다 미뤄졌던 의대 본과 시험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81년 1월 7일이었다. 갑자기 잡힌 시험날짜에 마음이 급해졌다. 부산으로 돌아와 공부하는 나에게 네비게이토에서 만난 본과 4학년 선배가 찾아왔다. 1월 1일부터 3박 4일간 네비게이토 수련회에 가자고 했다.
“7일이 본과시험”이라는 내 말에 선배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성경 말씀과 함께 “나도 의사국가고시 10일”이라고 했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수련회에서 첫 번째 운명을 만났다. 예수님이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됐고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선교지는 세상의 땅끝 북한이었다.
놀라운 경험도 계속됐다. 지혜의 눈이 떠졌고 머리가 깨우쳐졌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말씀을 암송했는데 이게 일상으로도 연결됐다. 의대 수업 내용이 술술 외워졌다. 덕분인지 시험은 무난하게 통과됐다.
두 번째 운명적 만남은 본과 3학년 때다. 나는 그 만남을 ‘나의 사랑, 나의 운명’이라 표현한다. 요샛말로 ‘모태솔로’였던 나는 청명한 가을 교정에서 한 여학생을 봤다.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 단아한 옷매무새에 스마트한 느낌의 그녀를 보자 가슴이 대책 없이 쿵쾅거렸다. 기독교 동아리 음악제에서 사회를 맡으며 야무지게 진행하는 솜씨도 눈길이 갔다. 답장 없는 연애편지도 보냈다. 같은 과 후배인 윤선희였다.
1년의 기다림 끝에 후배를 통해 학교 앞 빵집에서 만났다. 단팥빵 소보루빵을 앞에 두고 나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외려 그녀가 1년 전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며 누군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났다. 학교에선 의사고시를 앞두고 연애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전공의 2년 차가 됐을 때 우리는 결혼했다. 안성형 수술 전문의인 아내는 지금도 병원에서 나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