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살았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대 시절이라 말할 것 같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자취방을 나와 학교에서 종일 강의를 듣고 도서관으로 옮겨 밤늦게까지 책 속에 파묻히는 생활을 6년간 반복했다.
1985년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이 시작됐다. 보통 전문의가 되려면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을 거쳐야 한다. 인턴 1년간 하나의 전공과에서 1~2주씩 있으면서 모든 진료과목을 배우고 레지던트 과정에서는 자기 적성에 맞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전공과목을 선택한다.
자연히 인턴 생활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선 인턴을 ‘삼신’이라 불렀다. 먹을 게 생기면 게걸스럽게 먹으니 ‘걸신’, 장소 상관없이 아무 데서나 자니 ‘잠신’, 잔심부름부터 응급환자 진료까지 모든 일을 하면서도 선배들한테 못한다고 구박만 받으니 ‘병신’이라 했다.
나는 부산대학병원에서 내과 외과 할 것 없이 모든 과목을 돌았다. 하는 일은 응급환자 진료를 빼면 단순했다. 전공의들의 환자 정리, 의대생들의 성적 정리 등을 했다. “이게 인턴이 할 일이냐” “잡일만 한다”는 불만이 인턴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런 상황이 나에겐 기회가 됐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시골 촌놈이니 인턴 숙소에서 1년 내내 살았다. 크리스천이라 술도 하지 않으니 시간도 남아돌았다. 호출이 오면 신속하게 갔고 무슨 일이라도 군말 없이 했다.
어느새 ‘정근은 의국 해결사’라는 입소문이 났고 의국마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일도 있다. 한여름 안과 의국에서 인턴 업무를 할 때다. 한 선배가 ‘어이, 인턴’이라 부르더니 병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일 잘한다는 소리 들었다. 연구실에서 써야 하니 송충이 좀 가득 담아와 달라”고 했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을 이용해 산에 올랐다. 녹음이 짙은 숲에선 매미 소리가 가득했다. 20여분 숲길을 걸으니 키 높은 플라타너스에서 널따란 잎을 뜯고 있는 벌레들이 보였다. 살이 통통 오른 송충이가 아무리 많아도 병을 채우는 건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이 보였다. “얘들아, 송충이 잡아 오면 한 마리에 10원씩 줄게”라고 제안했다. 꼬마들은 내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는 송충이가 가득 채워졌다.
의사실에 돌아와 병을 내민 나를 보고 안과 선배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지시를 수행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이처럼 일이 주어지면 ‘예스(YES)’라고 말하며 수행하는 나의 적극적인 병원 생활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인턴 70명 중 1등이었다.
이는 전공의 시절로 이어졌다. 안과 전공의를 할 때 쓴 논문만 5편이었다. 보통 전공의가 평균 2편 쓰는 것과 비교하면 꽤 많은 셈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쉬워진다는 걸 전공의 때 배웠다. 그리고 부지런함은 어느새 습관이 됐다. 행여 게으른 마음이 생겨나면 ‘빈궁이 강도 같이 온다’는 잠언 6장 12절 말씀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지던 그때를 떠올린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