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인턴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나와 동기들은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갈림길에 서 있었다. 레지던트가 되면 전공과목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의학도에게 인기 있는 과목은 내과였다. 병을 낫게 하고 사람을 살리니 실력 있고 소신 있는 의학도가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컸다.
모두가 선택을 고민할 때 나는 예외였다. 이미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안과였다. 당시 안과는 안경을 맞추는 곳으로 여겨지던 때라 부모님은 “의대까지 가서 왜 안과냐”며 거세게 반대하셨다. 지금은 장모이신 당시 여자친구 어머니도 나를 집으로 불러 ‘선택을 바꿔달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안과 전공을 결심한 건 한 할머니의 기적을 본 뒤다. 인턴들은 매일 아침 주임교수를 따라다니며 회진을 돈다. 나 역시 주임교수를 따라 안과 병실을 돌 때였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보호자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나보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전날 만난 그 할머니가 부산대학교병원 안과 복도에서 시력표를 줄줄 읽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요한복음 9장을 떠올렸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순간이 할머니 모습과 오버랩됐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년처럼 충격과 감동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안과의 미래 가치였다. 앞으로 TV 게임 등으로 눈 건강을 해치는 환경이 될 것이고 10년만 지나면 안과 의사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얘기했다. 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들의 안과 치료도 많아질 것이라 했다.
놀랍게도 예측은 적중했다. 안과의사가 된 지 40년을 앞둔 지금, 안과는 의대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가 됐다. 안과 의사가 되고 나는 백내장 수술만 20만건 넘게 했다.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임명돼 부산대병원에서 근무하던 92년엔 부산 최초로 각막은행 설립도 주도했다.
각막 기증 운동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나부터 나섰다. 나와 우리 가족이 사후 각막 기증에 서약했고 의대 동기인 교수들도 동참했다. 학장을 비롯한 부산의대 교수 대부분이 기증을 약속했고 스승의 모습에 공감한 제자들도 함께했다. 의대와 간호대 학생 80%도 기증 의사를 밝혔다. 부산지역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각막 기증 운동은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기증자가 너무 많아 밤마다 이식을 위해 병원으로 불려가기 일쑤였다. 제자인 전공의들이 구급차를 타고 사망한 기증자 집에 가 병풍을 치고 각막을 적출하면 그사이 나는 병원에서 수술 대기자에게 연락해 이식 수술을 준비했다.
이런 경험들은 후에 개성공단 병원과 재난현장에서도 안과 진료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예수님을 본받아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광명을 되찾아 주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는데 힘이 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부산대 병원 안과 복도에서 할머니가 다시 세상을 보던 운명 같았던 때를 떠올리며 그 순간이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