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시절 특별한 만남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만남은 1987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대학교병원 안과 전공의인 나는 갑작스럽게 울산현대해성병원으로 가야 했다. 해성병원 안과 과장이 개원하며 나갔고 과장 자리가 비었다. 안과 의사가 귀하던 때라 해성병원은 적임자를 구하지 못했고 부산대 병원에 안과 전공의 파견을 요청했다. 28살 전공의 2년 차인 나는 졸지에 해성병원 안과 과장 직무대행을 맡아 전문의 역할을 하게 됐다. 매일 부산에서 울산으로 출퇴근하며 백내장 수술도 하고 환자도 봤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진료실에서 쉬는데 오후 진료 시작 시간에 맞춰 점퍼를 입은 노인이 진료실로 쑥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동행한 남성이 입을 뗐다.
“저는 비서고, 정주영 회장님이 눈 검사하러 오셨다”고 했다. “아 그렇습니까.” 순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정 회장을 의자에 앉혔다.
비서는 정 회장의 안압검사를 요청하며 왼쪽 눈은 실명해 검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줬다. 검사가 필요한 건 녹내장 안약을 넣는 오른쪽 눈이었다. 시력 검사 후 마취 안약을 넣을 때 소처럼 눈을 끔벅이던 정 회장이 검사를 시작하니 더 자주 눈을 감았다 떴다. 여러 번 측정해 평균치를 적는 방법밖에 없었다. 꾹 참고 검사를 마무리하자 정 회장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하고 진료실을 나갔다.
정 회장이 떠나고 나자 비로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다. 해성병원과 현대중공업 회장인 한국 최고 갑부가 진료 의사를 대기시켜 놓지도 않고 병원장도 대동하지 않은 채 진료실로 털레털레 걸어 들어와 진료를 받고 인사까지 한 뒤 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정 회장은 2주 뒤 다시 나를 찾아 왔다. 어김없이 오후 진료가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왔다는데 하필 나는 이날 오후 진료 시간에 늦었다. 오전 수술을 하면서 점심시간을 놓쳤고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느라 진료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진료실로 들어가니 정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말로는 20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마음속으로 ‘맙소사’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정 회장은 나에게 “선생이 안압을 편안하게 잘 재 또 왔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나에게 “괜찮다. 천천히 하라”고 다독였고 이후 정 회장은 울산에만 오면 비서 한 명만 데리고 안과부터 들러 검사만 하고 가셨다. 나중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농담도 건네셨다.
이후 정 회장의 삶은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한쪽 눈은 실명했고 다른 쪽 눈도 녹내장으로 시야가 좁은데 직원들과 축구 경기를 하며 어울리는 모습에서 소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될 때까지 하는 정신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말 ‘하면 된다’의 정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정 회장을 만난 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게 아닐까 싶다. 땅끝 북한 선교를 서원한 나는 정 회장이 1998년 소떼를 몰고 간 평안북도 정주 옆 개성의 그린닥터스 개성병원에서 진료했고, 이후 그린닥터스 재단이 현대아산상도 받았으니 말이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