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두 번째 시련은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잘나가던 시절 찾아왔다. 군의관 시절 보증을 서준 사람이 부도를 내면서 연대 보증 책임을 떠안게 됐다. 갚을 돈은 1억원이었고, 월급은 가압류됐다. 당시 대학교수 월급 10년 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만큼 큰 돈이었다.
시련은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개원이었다. 대학교수를 하다 개업하면 배신자로 찍히던 시절이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나를 격려했다. 동료들은 내 상황을 이해해줬고 주임 교수도 “잘하라”고 격려했다. 다들 부산의 최대 도심이던 남포동을 개원 장소로 추천했지만, 은행에서 빌린 돈 500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1994년 11월 서면의 초라한 건물 3층에 ‘정근 안과’를 열었다. 무리해서 최첨단 라식 장비를 들여놓고 열심히 진료했다. 힘들게 문을 열었지만, 병원은 잘 됐다. 입소문 덕이었다. 교수 시절 나는 안 해 본 수술이 없었다. 다른 곳에서 수술하다 실패한 환자, 수술이 어려워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높은 환자 등이 나에게 왔다. 성형외과에서만 다루던 안와골절도 과감히 시술했다. 그렇게 교수 시절 키워나간 수술 실력이 알려지면서 환자들이 병원을 찾았다.
바쁜 진료에도 빼놓지 않는 게 있었다. 이웃을 위한 의료봉사였다. 매년 5월 내가 출석하는 부산진구 백양로교회 주변 달동네에서 무료 진료 활동을 했다. 지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알려졌다.
그렇게 위기 상황에서 개인병원 문을 열며 기사회생했는데 살 만해지니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하루에도 기업 수십 개가 쓰러졌다. 고가 장비를 리스해 사용하던 의료계도 문 닫는 곳이 생겼다. 우리 병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IMF의 힘든 시간이 지나갈 무렵 나는 병원을 확장하기로 했다. 2000년 단층 판잣집을 12층 규모로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전히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를 때였다. 주변에선 무리한 시도라고 말렸지만, 위기는 기회라 생각했다. 아이디어도 세웠다. 여러 과목의 전문의들이 한 건물에서 개원해 종합병원 효과를 내는 ‘메디컬센터’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서면메디컬센터였다. 지금의 정근 안과병원 빌딩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역 언론은 의료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참신한 시도라 보도했다. 전국의 개원의들은 우리 센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왔다. 진료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서면메디컬센터는 병원인 동시에 선교센터 역할도 했다. 중국 등 외국인 유학생들에겐 주일 예배 장소가 됐고 국제 재난구호단체인 그린닥터스의 사무실도 입주했다. 현재 그린닥터스 사무실은 온종합병원에 있다.
외국인 근로자 진료소도 갖췄다. 불법체류자인 이들은 비싼 병원비 때문에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 센터를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연대보증의 시련은 내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