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나에게 새로운 곳에 시선을 두도록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두가 힘들었다. 기업은 쓰러지고 직장을 잃은 가장은 거리로 내몰렸다. 우리 병원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50만 달러에 리스한 라식 기계의 월 이자만 800만원이던 게 2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위기를 어떻게 견뎌냈나 싶을 정도로 아찔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은 그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진료실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특히 노인 환자에게 타격이 컸다. 수술을 권하면 입을 다물거나 “아들이 실직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번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진료실에 온 할머니가 “수술만 받으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함께 사는 아들이 실직한 상태라고 했다.
“사람 고치는 일이 먼저다. 수술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차근히 설명했다.
그렇게 저소득층 노인들의 무료 수술을 시작하게 됐고 시스템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 노인들은 눈만 안 좋은 게 아니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으니 다른 과 진료도 필요했다.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은 교회뿐이었다. 서둘러 출석교회인 백양로교회로 가 김태영 목사님을 만났다.
“요즘 사람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우리 교회가 나서서 구제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더니 목사님은 ‘좋은 방법’을 물었다.
나는 “영세한 지역주민들을 치료해주면 좋겠다”고 답한 뒤 교회가 봉사 조직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1997년 5월 탄생한 게 백양의료봉사단이다. 봉사단은 그린닥터스의 전신이 됐다. 창립멤버는 고교 동창, 부산의대 동기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함께 봉사하고 있다. 여기에 백양로교회를 다니는 성만호 치과 원장, 산부인과 전은숙 원장도 뜻을 같이했다. 봉사단엔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 불교까지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한 사람들이 모였다.
40, 50대 남성들로 구성된 교회의 바나바 남선교회도 봉사단에 합류해 행정을 돕고 약제를 챙겼다.
매년 5월 5일이나 석가탄신일엔 백양로교회 마당은 종합병원이 됐다. 전문의와 간호사, 봉사자들이 손발을 맞췄다. 한 번의 진료로 끝나지 않았다. 수술이 필요하거나 진료가 계속 필요한데 재정이 없는 이들은 봉사단 의사들의 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받거나 1년간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봉사의 영역은 IMF가 수습되고 경제가 살아나면서 해외로 확장됐다. 첫 해외 선교지는 북한이 보이는 중국 옌볜으로 정했다. 한일 월드컵으로 전국이 뜨거웠던 2002년 여름 봉사단은 중국 옌볜과 왕팅 지역으로 떠났다. 첫날 옌볜과학기술대학에서 진료하고 이튿날은 왕팅 지역 교회에서 진료했다. 중국 공산당의 종교국장이라는 한 간부는 자신도 교회에 다닌다면서도 우리를 감시했다. 한국에서 온 의사들이 무료로 진료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 왔다. 중국 당국의 감시에도 대부분 기독교인인 봉사단은 늘 예배하고 기도했다. 이후 중국 간부는 우리 일을 돕고 식사도 챙겼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