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근 (13) 부산 지역 의료 감당… 그린닥터스, APEC 의료지원

부산시의사회 법제이사였던 정근(맨 오른쪽) 원장이 2000년 의사 파업을 철회한 뒤 정부에 의사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궐기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의사로 살던 나에게 조직을 경험할 기회도 생겼다. 안과의사회 소속으로 일하던 중 2000년 부산시의사회에서 상임이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제안을 받자마자 든 생각이 ‘술’ 자리였다. 단체 일을 하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술자리로 이어졌다. 정중히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시의사회 박희두 부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듭된 설득에 별수 없이 수락했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회원들과 인사하는 상견례 자리가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술판이었다.

“정근 법제이사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부회장님, 저는 교회에 다녀 술을 안 마십니다. 죄송합니다.”

새까맣게 어린 후배가 선배 술잔을 거절하니 부회장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나도 여기서 무너지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에 “계속 이런 식으로 권하면 상임이사 그만두겠다”는 강수를 뒀다.

선배는 선배였다. 부회장은 “정근 이사는 사이다 한 병”이라며 통쾌하게 해결했다. 이후 나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의사회 일을 3년 내내 할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이 부산시의사회장이 된 뒤 나는 의사회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부회장직도 맡았다.

부산시의사회에서 일도 많았다. 상임이사가 된 그해 6월부터 의약분업과 함께 전국 의사들은 파업을 시작했다. 여론은 ‘의사가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부정적으로 봤고 검찰은 의사들의 구속수사를 천명했다. 누군가 파업 철회를 위해 총대를 메야 했다. 부산시의사회가 긴급회의를 열고 파업 철회안을 통과시킨 게 신호탄이 됐다. 전국 의사들이 파업을 철회했다.

의사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파업 철회를 이끌던 부산시의사회는 정부를 향해 궐기대회도 열었다. 파업 후에도 의사들이 경찰에 불려가는 상황이 계속되자 목소리를 내야 했다. 집회허가를 받은 합법적 궐기대회에서 의사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했다. 이후 전국 8만여명 의사들의 공적이 된 부산시의사회는 의사들의 응원을 받게 됐다.

무너진 의사들의 이미지 개선에도 나섰다. 방법은 단순했다. 본분을 충실히 하는 것이었다. 부산의 저소득 계층 어린이들을 무료 진료하고 의사들의 사회참여 봉사 비용인 1000만원을 치료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치료비에 사용했다. 날 선 시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술 없는 의사회’도 만들었다. 각 구·군 의사회 회장들은 건강도 챙기고 회비도 절약돼 일거양득이라는 호응을 보냈다. 2009년엔 부산시의사회장에 당선돼 3년간 헌신하기도 했다.

부산시의사회와는 별개로 2005년 11월 큰 행사도 감당했다. 미국 일본 등 아·태 지역 21개국 정상들이 부산에 모이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었다.

나는 APEC이 열리기 6개월 전 우연히 만난 준비단 담당자가 정상들의 건강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고 APEC 의료지원에 그린닥터스가 힘을 보태겠다고 제안했다. 부산대병원 동아대병원 고신의료원 부산백병원 등 부산지역 병원과 의료단 구성도 협의했다. ‘APEC 의료단’이 공식 출범했고 철저히 준비했다. 그리고 1주일의 APEC 일정을 무탈하게 마무리했다. 나에겐 조직을 이끌고 협의하는 과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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