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속설이 있다. 신당(神堂)이 500여곳, 절이 500여곳이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무속신앙과 불교가 판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제주에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 교회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핍박도 심했다. 제주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곤 했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난 모든 것을 감수하고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기로 하고 미신과 결별했다. 예수를 믿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유산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과의 관계도 소원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는 아이들이 놀 만한 곳이 없었기에 학교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100명 가까운 아이들이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는 혼자 교회학교를 감당할 수 없어서 중학생들을 교사로 임명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가 늘 편안하고 평안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생각지 못한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났다.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왜 교회에 이런 일들이 생겨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당시 교회는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과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으로 나누어져서 여러 가지 문제로 서로 감정이 상해 싸움이 생기게 되고 결국엔 예배도 양쪽으로 나누어 드리곤 했다.
나는 예장에 속해 있었는데 예장 쪽 청년은 나 혼자였다. 장로님 한 분과 안수집사 등 다섯 가정으로 모두 2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기장 측은 청년들도 많았고 교인 수도 100명이 넘을 정도가 되었다. 갈등이 심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혈투가 벌어져 교단 대표들은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나누고 기장 교회가 따로 나가기로 결정됐다.
기장 교회 측 장로님은 면 의회 의장이라 면사무소 의회실에서 예배를 드렸고, 우리 쪽 예장은 교회 본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기장 교회는 새 부지를 마련해 석조 건물로 웅장하게 교회당을 지었다. 분쟁 속에서 우리 예장 교회는 함석지붕까지 뜯기고 풍금마저 빼앗겨 버린 채 허름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다행히 이웃교회(보목교회)에서 풍금을 마련해 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후 전도사님을 모시고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분열된 두 교회는 아픔을 털어내고 1956년 3월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기쁨을 누렸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도 술술 풀렸다. 성도들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서로 희생할 때 다시 올바로 세워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