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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여가를 바꾼 멀티플렉스 20년 ‘빛과 그늘’

서울 용산구에 있는 멀티플렉스 ‘CGV 용산아이파크몰’에 들어선 ‘4DX 위드 스크린 X’ 상영관. 극장의 3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스크린 X’와 오감으로 영화를 느낄 수 있는 4DX 영화관이 결합된 극장이다. CJ CGV 제공




시간을 되돌려보자.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영화관의 풍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티켓을 사려면 극장에 가야 했고 자주 암표를 구하느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인기작이어도 유명 영화관 한 곳에서만 상영하는 단관 개봉이 일반적이어서 영화를 보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했다. 극장은 음습했고 좌석은 비좁았다.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영화관은 과거보다 훨씬 쾌적해졌다. 영화를 보고 싶을 땐 슬리퍼를 끌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복합 상영관)를 찾으면 된다. 예매는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하다. 아무리 인기작이어도 충분히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으니 암표 역시 많이 사라졌다.

이렇듯 한국인의 영화 관람 문화는 크게 달라졌다. 시작은 1998년이었다. 그해 4월 4일 서울 광진구엔 국내 첫 멀티플렉스인 ‘CGV강변11’이 들어섰다. 멀티플렉스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기존 극장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런 영화관은 전국에 잇달아 등장했다. 그렇다면 멀티플렉스가 국내 영화시장, 나아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멀티플렉스, 한국인의 여가를 바꾸다

멀티플렉스는 통상 6개관 이상을 갖추고 있으면서 쇼핑 외식 게임 등 다양한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복합놀이공간을 가리킨다. 단관 극장만 있던 시절, 시민들은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쇼핑을 하듯이 일단 극장을 찾은 뒤 무슨 영화를 볼지 선택하곤 한다. 이 같은 변화는 영화시장의 성장을 견인하는 끌차 역할을 했다.

22일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99년 당시 1년간 극장을 찾은 총 관객은 5472만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확산되면서 극장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자 영화관을 찾는 시민은 급증했다. 국내 영화시장은 2002년 1억 관객을 돌파했고, 2013년부터는 매년 극장을 찾는 인원이 2억명을 웃돌고 있다. 국민 1명이 1년에 4번 이상 영화관을 찾는 셈이다.

멀티플렉스의 부상은 단관 극장의 위상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2017 한국영화연감’을 보면 2016년 기준 전국 극장 417곳 가운데 멀티플렉스는 353곳으로 80.3%나 된다. 특히 이 기간 극장을 찾은 2억1702만여명 가운데 96%는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멀티플렉스마다 많게는 10개 넘는 스크린을 갖추고 있으니 시민들은 언제든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영화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여가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은 “단관 극장만 있던 시절엔 추석이나 설날이면 종로나 충무로로 우르르 몰려가 길게 줄을 서는 게 일반적이었다”며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나타나면서 이런 풍경은 사라졌다. 멀티플렉스는 영화 관람이 한국인의 대표적인 여가 문화로 자리 잡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는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시민들은 영화를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며 “영화 산업의 규모가 커진 주효한 이유 중 하나가 멀티플렉스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영화 상영의 시스템까지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영화는 시내 개봉관에서 ‘1차 상영’을 한 뒤 관객이 감소하면 시 외곽 재개봉관으로 밀려났다. 그 다음엔 한 편 가격에 두 편을 틀어주는 동시상영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극장가를 주름잡으면서 ‘개봉관→재개봉관→동시상영관’으로 이어지던 상영 체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멀티플렉스 20년이 남긴 빛과 그늘

영화 시장의 성장은 과거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1000만 영화’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03년 개봉한 한국영화 ‘실미도’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국내외 영화 20편이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93년 4월 개봉한 영화 ‘서편제’는 1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3개월 넘게 걸렸지만 지금은 아니다. 예컨대 2014년 여름에 내걸린 ‘명량’은 개봉 하루 만에 100만 관객을 모아 눈길을 끌었다.

영화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덩치는 커졌다. 1998년 한국영화 편당 제작비는 15억원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제작비가 100억원 넘게 투입된 작품이 한두 편이 아니다.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90년대만 하더라도 20∼30% 수준에 그치던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2011년부터는 7년 연속 50%를 웃돌고 있다.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상영관이 등장하면서 영화 관람의 즐거움도 배가됐다. CGV만 하더라도 멀티 프로젝션 상영관(극장 정면과 좌우 벽면을 모두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극장)인 ‘스크린 X’를 비롯해 의자가 움직이거나 바람이 부는 4DX 상영관을 선보이고 있다.

조성진 CGV 전략지원담당은 “과거 관객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면, 지금은 영화를 ‘체험’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IPTV나 스마트폰 등 극장을 대체할 수 있는 플랫폼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지만 영화관만이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서 “미래의 멀티플렉스는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컬처플렉스’로 진화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의 확산이 영화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건 아니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영화에 스크린을 몰아주는 ‘스크린 독과점’ 현상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스크린 몰아주기로 관객들의 영화 선택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상당수 멀티플렉스가 아침이나 심야에 ‘작은 영화’를 내걸고 관객이 잘 드는 시간에 대작을 배치하는 ‘퐁당퐁당 상영(교차 상영)’을 한다는 점도 문제다. 영화계 안팎에서는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이 멀티플렉스를 통해 영화시장을 장악하면서 시장 논리가 영화계를 지배하게 됐다는 한탄도 나온다. 최근 멀티플렉스 3사(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는 마치 짠 듯이 차례로 티켓 가격을 1000원 인상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영화평론가인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멀티플렉스가 확산되면서 한국영화의 다양성도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대작 중심으로 스크린이 배정되는 탓에 로맨틱코미디나 멜로 영화처럼 ‘중간 사이즈’ 작품들은 입지가 좁아졌다”며 “과거보다 액션 SF 스릴러 같은 장르의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는 데엔 멀티플렉스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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