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은 적대관계 조장하는폭력이고, 오히려 사회문제 은폐
혐오 발언의 방치가 더 위험한가 권력의 검열·규제가 더 위험한가
규제는 표현 자유에 대한 폭력… 말의 자유시장에서 자정돼야
폭력적인 말이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 범람하고 있는 혐오 표현들은 우리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김치녀’ ‘한남충’처럼 한국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비하하여 남녀갈등을 유발하는 표현부터 노인을 낮춰 부르는 ‘틀딱충’과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똥꼬충’처럼 사회적 차별을 표현하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혐오 발언과 표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있다. 이 갑작스러운 반문화적 문화 현상이 지극히 낯설고 불편하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분열시키고 있는 분열의 현상은 남녀갈등과 세대갈등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혐오 발언과 혐오 표현이 이 갈등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갈등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은 종종 다양한 의견을 끌어내어 사회를 혁신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의 문화가 없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의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혐오하거나 증오하고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면 그것은 분명 ‘혐오 사회’다.
여혐이 남혐을 유발하는 것처럼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사회는 상당히 위험하다. 갈등과 분열의 위기가 증대하면 할수록 정부가 나서서 혐오 발언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위험한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정부 권력에 의한 혐오 발언의 검열과 규제가 더 위험한가.
이 물음은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왜’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지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편하게 느끼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경계와 한계를 보여준다.
첫째, 인종·민족·성·성적 취향·종교·연령 또는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부정적 신념과 감정을 표현하는 혐오 발언은 공동체의 토대를 침식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상종 못할 사람처럼 취급하는 혐오 발언은 건강한 공감 능력을 파괴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고 이타적 행위로 이끌지만, 혐오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인간성을 말살하는 잔인한 힘을 갖고 있다. 누군가의 오빠와 아버지일 수 있고, 누군가의 누나와 엄마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단지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적대관계를 조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둘째, 혐오 발언은 그 배경과 원인이 된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한다. 모든 발언은 사회를 바라보는 개인과 집단의 특수한 위치와 입장을 반영한다. 일자리를 둘러싸고 적나라한 경쟁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감을 위협받은 사람들의 불만이 여혐으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고, 사회가 민주화되었음에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가부장적 가치와 질서에 대한 반발이 남혐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여하튼 강남역 살인사건, 불법 몰카, 미투 폭로, 성차별, 만성적 청년실업 등의 구체적 사회문제는 여혐, 남혐의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증발해 버린다. 설령 재미와 놀이의 양식이라고 할지라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적대적인 성 대결로 치환하는 혐오 발언은 폭력적이다.
끝으로, 혐오 발언은 다른 사람의 의견과 관점을 경청하기는커녕 상대방을 침묵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폭력은 말이 없다.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와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최대의 폭력이다. 같은 사회에 살면서도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것이 혐오 발언이다. 다른 사람을 역겨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벌레(蟲)에 비유하여 비하하는 혐오 발언은 희생자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결국 침묵시킨다.
혐오 발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사회의 토대인 표현의 자유와 충돌한다. 표현의 자유를 적극 주장한 존 밀턴은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여 금지하는 것은 해롭다고 말한다. 진리와 허위가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맞붙어 논쟁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우리에게 불편해서 허용하고 싶지 않은 것의 도전을 받는다. 혐오 표현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법으로 규제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더 커다란 폭력에 직면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관용할 수 있는지 시험당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는 점을 인식, 혐오 발언이 말의 자유 시장을 통해 자정되기를 기대한다.
이진우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