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더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굳이 먹고 싶지 않은 음식도 있긴 하지만, 죽어도 못 먹겠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무슨 신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행지에서는 반드시 현지 음식을 찾아먹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유별스러움도 없지만, 라면이나 고추장을 여행가방에 챙겨 넣는 식의 유난스러움도 없다. 음식 때문에 외국 여행을 겁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사람은,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낯선 메뉴를 상대로 만용을 부리기 쉬운데, 나는 음식을 포함해서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라 음식을 고를 때 모험을 하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음식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는, 그러니까 모험심이나 까다로운 입맛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끼니를 때우는 식의 허술한 식사를 여러 차례 한 터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한번 해보자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웨이터의 설명을 충분히 듣고(들었다고 생각하고) 주문한 ‘오늘의 요리’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고, 당연히 소고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의 날것인 갈비는 양고기였다. 나는 재료나 조리에 문제가 있지 않고는 사람이 먹는 음식에서 이렇게 이상한 냄새가 날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뭐가 문제라는 거냐고 묻는 웨이터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나는 기왕 시킨 음식이니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이런 걸 먹으라고 접시에 내놓는단 말인가, 이렇게 역하고 짜고 느끼하고 거의 날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이걸 음식이라고…. 나는 샌드위치나 핫도그를 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투덜거렸다. 짜증이 나려고 했다. 나는 동조를 구할 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내가 시킨 것과 같은 요리를 아무 불만 없이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은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문제가 있다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불만과 투덜거림을 그들이 눈치챘을까 봐 걱정되었다. 내가 오랫동안 거리낌 없이 먹어왔고 지금도 맛있게 먹고 있는, 가령 순대국이나 낙지볶음 같은 음식에 대해 그런 음식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먹느냐고 투덜거리는 것처럼 내 투덜거림이 옳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입맛 역시 문화인 것이다. 아니, 음식이야말로 문화인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입맛이겠는가. 누군가 맛있게 먹는 해산물을 누군가는 입에 대지 못한다. 날것을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한다. 어떤 사람이 느끼하고 짜고 냄새나는 고기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느끼하고 짜고 냄새난다고 꺼리는 고기를 어떤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는 것이다. 우리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는 음식에 대해 투덜거릴 권리는 없다.
단지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우주와 같이 크고 복잡하다. 개인을 형성하는 인자들은 수없이 많고, 그 인자들이 작용하는 방식 또한 수없이 많고 제각각이어서 개인을 고유하게 만든다.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내면이 똑같다고 추측할 수 없다. 넘치는 사랑 속에서 성장한 사람과 사랑 없이 성장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니체만 읽은 사람과 니체도 읽은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나’는 유일한 개인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정현종 시인은 노래했다(‘방문객’).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의 ‘입맛’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되고, 그 사람 자신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그에게 ‘가는’ 내가 그의 ‘입맛’으로 판단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이해 받을 수 있는 길이다. 깊은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해력의 깊이가 아니라 이해 대상에 대한 깊은 존중이다. 타인의 입맛에 대해 투덜거릴 수 없는 것처럼 타인의 취향과 기호와 꿈과 가치관과 미적 감각에 대해서도 투덜거릴 수 없다.
우리는 잘 알아서 투덜거린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실은 모르기 때문에 투덜거린다. 그런데도 투덜거리기만 한다면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