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가 열렸다. 법원이 ‘허위사실 유포자’로 판결한 극우주의자 지만원씨가 연설을 했다. 이미 귀를 씻었으니 그 말을 입에 담지 않겠다. 국회가 세금으로 허위사실을 들어주고 주장하는 공간인가, 하는 처참한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공당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가세한 점이다. 이종명 의원은 “폭동이라 했던 5·18이 정치세력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고 했다. 김순례 의원은 “종북 좌파들이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에 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을 학살한 것처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상식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법적 해석은 물론이고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해석을 달리할 여지도 전혀 없다. 1990년 노태우 정권 때 여야 합의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후 지금까지 몇 번이고 보수와 진보의 합의가 근본적 이견 없이 이뤄져 왔다. 이를 부인한다는 것은 한국의 현대사를 1990년 이전으로 되돌리자는 뜻이다. 거기 무엇이 있을까.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있었고, 박정희 개인의 영구 집권을 획책한 유신 독재가 있었다. 독재는 자유의 피를 빨면서 자라므로, 시민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거듭됐다. 이들은 이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일까. 설마….
이번 사태는 역사 부정 세력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국회를 침공한 ‘시발적’ 사건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역사 부정의 일상화는 사회 전체가 파시즘 같은 파멸적 전체주의로 기울어지는 한 증후다. 긴급한 수술로 환부를 도려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에서 곪는 병까지 치유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분명히 걸린다. 비슷한 일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났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의회를 통해 ‘합법적으로’ 국가를 점거했고, 시민의 자유를 약탈했으며, 파멸적 전쟁을 일으켰고, 무고한 유대인을 학살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대 정치철학은 대부분 ‘파시즘 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는 일에 할애된다. ‘합리적’ 주체인 대중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자유를 반납하고 굴종을 선택해 파시스트가 되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는 봉건 신분사회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나타난 평등한 개인들이 자유로운 시민적 정체성을 만끽하는 대신 나치 같은 폭력적 정치집단에 의해 조직되면서 스스로 폭민(mob)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현대 물질문명이 불러온 잉여성, 즉 소외와 고독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한 시민으로 존중받지 못한 채 추방되었다고 느끼는 잉여들을 양분 삼아 파시즘은 자라난다. 혈연, 지연 등으로 이뤄진 낡은 공동체는 해체됐는데 안식할 만한 공동체는 아직 보이지 않는 사회는 쉽게 파시즘의 먹이가 된다. 가족한테 경제적 정서적으로 버림받은 데다 직장마저 잃은 이들이 많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소속감이 박탈된 대중은 절망과 증오를 극화하고, 위대한 과거를 재현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겠다는 지도자를 ‘메시아’처럼 섬긴다. 이것이 ‘전체주의의 대중심리학’이다. 극우로 급속히 기울어진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대중들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독일의 역사적 경험은, 정치 내부의 철저한 정화와 더불어 소외된 대중들이 소속을 자부할 만한 정치경제적 역할을 개발하고 사회문화적 메시지를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 망령에 사로잡힌 폭력적 정치집단들은 이들로 하여금 사회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도록 충동질해 일종의 집단 광기를 유발함으로써 역사를 부정하고 사회 전체를 전복하려는 기도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저절로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을 시민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누군가 현실 속에서 시민적 정체성을 잃었거나 미처 형성하지 못했다면 사회 전체가 공감 속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역사 부정을 근절하고 전체주의의 발흥을 막는 길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