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의 시집 ‘마음의 오지’ 들머리를 장식한 작품 ‘노독’에는 이런 시구가 등장한다.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극야행’의 저자 가쿠하타 유스케(43)는 이 시에 등장하는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의 죗값을 단단히 치른 일본의 탐험가다. 그는 그린란드로 날아가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태양이 뜨지 않는 극야의 세계를 탐험했다. “길이 그만 내려서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계속 전진했고 어둠의 심연을 향해 꾸준히 걸음을 내디뎠다. 엄청난 추위와 배고픔을, 혹독한 외로움을 견뎌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 이런 모험에 나섰던 것일까.
밤의 한복판으로 떠난 여행
일단 저자가 체험한 극야(極夜)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극야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칠흑의 밤이다. 극지방에서는 위도에 따라 길게는 3~4개월 해가 뜨지 않는다. 북극점 부근은 1년 중 절반이 극야다. 일출과 일몰을 1년에 한 번씩만 볼 수 있다.
저자는 대학 시절부터 오지를 모험하는 데 이골이 난 인물이다. 2003~2008년엔 아사히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기도 했다. 오지 탐험을 즐기는 이유는 “시스템의 바깥 세계”를 동경해서다. 과거 인류가 벌인 탐험 대부분은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제 지구상에 미답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체감하지 못한 세계는 존재한다. 극야의 세계가 그런 경우다. 저자는 극야의 세계가 “지도의 공백부”라고,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극야의 세계를 헤매다가 북극해에서 움트는 태양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낮과 밤을, 빛과 어둠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야 세계를 탐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탐험은 빙하를 넘은 뒤 빙상(대륙 빙하)과 툰드라 지대를 거쳐 북극해에 도달하는 코스였다. 출발선은 지구상의 최북단 수렵 마을인 시오라팔루크. 그는 식량과 텐트를 실은 썰매를 끌고, 개 한 마리를 데리고 2016년 12월 6일 이곳을 떠나 밤의 심연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탐험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무지막지한 블리자드(눈보라를 동반한 강풍) 탓에 천측(天測)을 통해 방향을 가르쳐주는 육분의를 잃어버렸다. 저자는 지도와 나침반에만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세상 가득 가없이 펼쳐진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이 어디서 얼마나 걸어왔는지, 얼마나 가야 기착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끔은 지금 걷는 길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저곳이 그곳이겠거니 생각하며 가보면 그곳이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종내엔 자신의 ‘감각’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믿었던 내 신체 감각을 버려야 했다. 감각에 기댄 판단을 그만둬야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북극성이 가리키는 방위만을 믿어야 한다. 한 점 의심 없이 의지하고 북극성의 말씀에 매달려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불안이 움트지 않는다.”
절체절명 백척간두 설상가상 좌충우돌 천신만고…. 탐험에서는 이들 수식어를 모두 갖다 붙여도 부족할 정도로 위험천만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이어졌다. 가장 문제가 된 건 식량이었다. 저자는 기착지인 아운나르톡과 이누아피슈아크 오두막에 탐험을 시작하기 전 식량을 잔뜩 쟁여놨었는데,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식량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백곰이 먹어치워버린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탐험은 끝났다고, 모든 건 실패했다고 여겼다. 남은 식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출발지로 돌아가려면 극야가 끝나길 기다려야 했다. 사고무친의 땅에서 굶주리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저자에겐 마지막 “숨은 식량”, 바로 개가 있었다. 저자는 ‘최후의 순간’ 개가 마주할 운명이 불쌍해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져가는 개를 보면서 “얼마 남지 않은 (개의) 고기 양”을 아쉬워했다. 개는 탐험 기간 내내 저자의 인분을 즐겨먹었기에, 개를 보고 있으면 “고기에서 냄새가 날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빛과 어둠, 그리고 가족
기상천외한 저자의 탐험은 성공했을까. 그가 애지중지 키우던 개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이야기의 결말은 밝히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책의 포인트가 탐험의 성패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거다. ‘극야행’은 삶과 죽음의 뜻을 되새기게 만드는 수작이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독자를 숙연하게 만드는 파워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저자가 풀어낸 아름다운 문장을 매끈하게 마름질한 번역 역시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각별한 의미를 띠는 건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에게는 별빛과 달빛이 탐험의 조타수였다. 어느 별이 걸어가야 할 방향과 가까운 곳에 있는지 찾으면서 별빛을 향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밤하늘에 뜬 부동(不動)의 존재인 북극성은 “완전무결한 신”이었다.
“매일 열심히 별을 쳐다보고 있자니 별마다 개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생명줄을 쥔 별들은 가스와 먼지와 암석이 응축된 무기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인 것만 같았다.”
달빛은 탐험의 모든 걸 쥐락펴락했다. 태양이 가뭇없이 자취를 감춘 땅에서 달은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달이 차고 기우는 과정에 맞춰 여정을 짰다. 달빛에 의지해 걸음을 내디디고 썰매를 끌었다. 낮에는 먹물 속처럼 어둡던 공간이 달빛을 받으면 환상적으로 바뀌곤 했다.
저자는 이번 탐험을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극야 탐험의 철학으로 삼은 것도 ‘탈(脫) 시스템’이다. GPS 장비도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위성전화는 챙겨갔다. 고국에서 주야장천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를, 어린 딸을 모른 척 할 순 없었다.
“나는 가족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알릴 때만 쓰겠다는 핑계를 붙이고 위성전화를 들고 오고야 말았다. 인간 사회의 모든 시스템 중에서 벗어나기 가장 어려운 것은 태양도 GPS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사실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극야가 끝나고 저자는 태양을 다시 마주했다. 희뿌연 땅 저 끝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면서 아이처럼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멋있다” “크다” “따뜻하다”…. 그의 눈엔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를 눈물짓게 만든 건 탐험이 끝났다는 허탈감이었을까, 아니면 극야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었을까.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밤을 노래한 들큼한 문장을 남긴 시인이나 소설가는 한두 명이 아니다. 예컨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밤에 드리는 시’에 이런 구절을 적어두었다. “밤이 가지고 오는 모든 것을/ 조용히 맞아들이는 네 모습을 보여주어라/ 네 몸을 아주 밤에 맡기면/ 비로소 밤이 너를 알아보리라.” 아마도 ‘극야행’을 펴낸 일본의 이 괴짜 탐험가는 릴케의 작품에 담긴 속뜻을 세계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