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가운데 평범한 할머니들의 삶과 이야기를 담은 영화와 책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지금 세대의 여성 서사가 윗세대로까지 확장되는 분위기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 혹독한 가부장제를 통과한 여성들의 인내와 사랑, 지혜가 있는 듯하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펜을 쥐었다.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윤금순 할머니, 글자를 몰라 어린 아들이 내민 숙제도 가르쳐줄 수 없었다는 김점순 할머니…. 달력과 전단지 뒷면에 삐뚤빼뚤 적힌 글씨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느지막이 글을 읽고 쓰게 된 할머니들의 뭉클한 기쁨이 녹아있다. 한 글자씩 읊조리며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는 그 모습이 적잖이 감동스럽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인 할매’(감독 이종은)는 전남 곡성에 사는 여섯 명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짤막한 시에 당신 인생의 자취를 담아내는 과정을 그린다. 김막동(84) 김점순(80) 박점례(72) 안기임(83) 양양금(72) 윤금순(82) 할머니가 그 주인공. 김선자(48) 길작은도서관 관장의 도움으로 2009년 한글 공부를 시작한 이들은 2016년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까지 출간한 어엿한 시인들이다. 황혼에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제2의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시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건 자식 사랑이다. ‘세월이 어느덧 지나고/ 벌로 살았다/ 우리 손자들 사랑한다.’(김점순 할머니)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 (너희들은) 아프지 말고 살아라.’(양정순 할머니)
이종은 감독은 “지친 어깨로 불쑥 찾아가도 언제든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시인 할매’ 그 자체”라고 했다.
비슷한 소재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한 편 더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27일 개봉하는 ‘칠곡 가시나들’이다. 영화는 경북 칠곡에 사는 강금연(85) 곽두조(88) 김두선(86) 박금분(89) 박월선(89) 안윤선(83) 이원순(82) 일곱 할머니들이 한글을 익히고 시를 쓰며 누리는 일상의 즐거움을 담는다.
칠곡 할머니들도 ‘시가 뭐고?’(2015)와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2016) 두 편의 시집을 출간했다. 죽음에 초연한 태도가 인상 깊다. ‘몸이 아프면/ 빨리 죽어야지 싶고/ 재미있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싶다/ 내 마음이 이래 왔다갔다 한다.’(박금분 할머니)
영화의 분위기는 매우 경쾌하다. 김재환 감독은 “할머니들이 처음 한글을 접하며 느끼신 ‘설렘’을 담아내고자 했다”면서 “더불어 ‘재미있게 나이듦’을 표현하려 했다. 나이든 이들도 우울함이나 두려움만 느끼는 게 아니라, 삶의 재미를 추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최근 출간된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표지·남해의봄날)는 여든 앞에서 글과 그림을 배운 전남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모음이다. 고단했던 하루하루를 힘껏 살아온 순천의 할머니 스무 명이 뒤늦게 글을 익히고 그림을 배워 지나온 인생을 담았다. 눈물과 웃음이 녹아있는 글과 명랑하고 순박한 그림 100여점을 모은 책인데 독자들 반응이 뜨겁다.
지난해 8월에 나온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양철북)은 강원도 양양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여년간 쓴 일기 중 150여편을 모은 책이다. 여자가 무슨 글이냐는 호통에 할머니는 예순넷이 돼서야 도라지 판 돈으로 공책을 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 속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문장이 툭 가슴을 친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는 세월이 가르쳐준 삶의 지혜와 진실이 있다.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할머니들은 여성으로서 요구받았던 양육자의 의무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동안 삶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그 내용은 젊은 세대가 쉽게 배우기 힘든 삶의 지혜나 진실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남영 강주화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