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미래, 당신은 빛과 어둠 어느 세계를 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전문 지식을 최대한 발휘해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구성하거나, 그 세계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아내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SF 작가 10명이 토피아 단편선 1권 ‘전쟁은 끝났어요’와 2권 ‘텅 빈 거품’을 써서 모았다.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과학 전공 작가 중심의 단편집이다. 이들은 전공자답게 수학 생화학 생명공학 로봇공학 우주공학 전자공학 천문학 등의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또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를 오가며 역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전쟁은 끝났어요’는 유토피아 세계관을 택한 작가 5명이 쓴 작품 모음이다. 표제작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생체조직의 화학영상법을 연구한 이산화 작가가 썼다. 배경은 생화학자, 동물행동학자, 영장류학자 등이 모인 정글 보호구역 나알루켐바. 전 세계에서 모인 학자들은 파벌 전쟁을 벌이는 침팬지들을 관찰하는 중이다.
침팬지들의 폭력을 분석해 인간 사이의 폭력이나 집단 간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알아내고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연구자들은 침팬지의 충돌에 간섭하지 않고 관찰해야 한다는 ‘관찰 파벌’과 개입을 통해 갈등을 줄이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개입 파벌’이 나뉘어 팽팽한 기싸움을 벌인다. 분류하자면 ‘개입 파벌’인 생화학자 ‘나’는 이 사이에서 은밀한 실험을 설계한다.
“마음은 곧 분자이니 전쟁이란 일종의 화학반응”이라는 가설에 따라 다툼을 끝낼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을 투여하는 방식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 단편은 특정 호르몬 수용체(5-HT1E)의 기능에 대한 학계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갈등에 대해 흥미로운 상상력을 펼친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만들어 내기 어려운 기발한 이야기다.
이외 행성 충돌에 대비해 지구를 탈출하고(‘무한의 시작’), 로봇들이 가는 사후 세계를 그린(‘로보타 코메디아’) 단편도 있다.
‘텅 빈 거품’에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택한 작가들의 단편 5편이 수록됐다. 가장 관심 가는 작품은 주물공장에서 10년가량 일하며 구상한 이야기 300여편을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내 화제가 됐던 작가 김동식의 ‘두 행성의 구조 신호’. 배경은 우주 시대다. 전 우주를 누비며 구호 활동을 펼치는 우주구호국에 구조 신호가 접수된다.
보그나르와 카느다르라는 두 행성이 서로를 침략자로 지목하며 구조를 요청한 것이다. 구호국 소속 프레드와 레이첼은 각각의 행성을 구조하기 위해 함께 출발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이미 두 행성은 멸종된 상태다. 프레드는 보그나르 행성 지하에서 이 별의 역사와 문명이 기록된 공간을 발견한다. 레이첼은 카느다르 행성에서 거대한 씨앗 은행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정자와 난자가 동결 보존돼 있다.
프레드는 “한쪽은 기록으로나마 영원히 남기를 바랐고, 다른 한쪽은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네”라고 한다. 둘은 동족인 두 행성이 핵전쟁 끝에 공멸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기발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짧은 단편에 재미에다 의미까지 담아낸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여기에는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인간의 청각신경에 탑재돼 인간이 통제받는 세상도 있고(‘벗’), 인간이 떠난 뒤 인공지능만 남은 행성이 그려지기도 한다(‘너의 유토피아’).
두 작품집은 각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주된 배경으로 하지만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해서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김보경 작가는 기획자의 말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미묘하게 섞여 있어 즐거운 감흥을 준다. 때로는 절망 끝에 희망이 오기도 하고, 희망 끝에 절망이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청탁 단계에서부터 전문 지식을 활용해달라는 주문을 했기 때문에 SF 소설로서 큰 지적 즐거움을 준다는 특장점이 있다. 작품 대부분이 세계의 변화와 변혁을 지향한다는 점도 감동적이다. SF 장르에 호기심을 가진 독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만끽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과학 지식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고 우주라는 배경이 낯설지도 모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