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은 삼키기 어려운 쓰디쓴 약이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가 배신이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릴 때, 자신의 희생을 몰라주고 도리어 무시할 때, 진심으로 헌신했던 상대에게서 거짓을 확인하게 될 때 배신감을 느낀다. 배신은 자기의 성공과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해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저지르는 죄 중에서 가장 심층에 자리한다. 배신을 당한 사람 역시 그 상처는 깊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배신과 음모가 있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배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의 배신과 거절을 당한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 배신은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유월절 마가의 다락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다.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식탁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석탄처럼 어둡고 돌덩이처럼 무거웠지만 시선만큼은 여전히 제자들을 따뜻하게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스승의 돌직구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주여. 설마 저는 아니지요?” “저도 아니지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 것이다. 인자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면서 가장 먼저 그에게 빵 조각을 포도주에 적셔 건넸다. 그리고 “하려던 일을 속히 하라”(요 13:27)고 하셨다. 베드로에게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유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죄책감과 후회에 함몰되지 않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함께 감당하겠으니 다시 시작하자꾸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다.
십자가 수난을 여는 이날 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다시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예수님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셨다. 제자들의 배신을 알고 계셨지만 아무 말씀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나누며 그들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사이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유다나 베드로 모두 배신 후 회개했지만 그 정도는 다르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마 26:75)했으나 유다는 단지 “뉘우침”(마 27:3)뿐이다. 예수의 정죄 됨을 보고 ‘뉘우친’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다에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말한다. 그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깨우쳤다면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다. 공동체로 돌아가거나 예수님을 찾으러 가야 했다. 그는 목숨을 끊을 때까지 스스로 한계에 갇혀 있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갔고 이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회개가 아닌 뉘우침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유다가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예수님이 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차원이 달랐다. 열심당원인 유다는 자기가 모시는 예수님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꿈꾸었던 야망을 예수를 통해 이루고 싶었을 것이다.
유다의 배신의 뿌리는 이생의 삶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유다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주님을 수시로 배신한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좇아간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배신과 다를 바가 없다. 일을 사람보다 더 사랑하며 자신의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가차 없이 끊어버리고 배신의 길을 가게 된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떤 방법이라도 불사하려는 마음이 솟듯, 우리 안의 유다가 고개를 들 때가 있다. 유다처럼 예수를 팔아 버리는 죄를 짓지 않을지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은 배신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그래도 너는 내 아이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피투성이가 된 마음으로 절뚝절뚝 피를 흘리며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신다. 인간의 배신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진행된다. 배신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
세계적인 여성 신학자인 새라 코클리는 ‘십자가: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에서 진정한 비극은 유다가 베드로와 달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흘러넘치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다의 진정한 비극은 베드로와 달리 저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절망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흘러넘치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 그분께서는 배신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코클리는 오늘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밤을 여는 ‘유다의 밤’이며 ‘우리들의 밤’이라고 말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갈망으로 점철된 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절망에 빠진 이 밤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을 빚으실 수 있으며 그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다.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서 광야의 음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예수님은 날개를 펴듯 팔을 벌려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자신을 배신하고 거부하는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자신의 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 계신다.
▒ 배신에 하나 더
배신의 상처, 치유는 용서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내라
배신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컸다면 그 상처도 깊다. 배우자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할 때 삶은 산산이 조각나는 듯하다. 배신의 가장 독한 영향은 배신당한 사람에게 깊은 불신을 남긴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다양한 배신의 방법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한 사람이 쌓아놓은 것을 공공연하게 혹은 암암리에 끊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신뢰를 이용하는 것이다.
배신의 상처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배신을 당했다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은 삶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남은 평생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학자 데이비드 시맨즈는 ‘기억의 치유’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지닌 진정한 비극은 기억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아픔이 아니라 아픔과 압박 때문에 인간관계와 삶에 잘못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그 사람’을 배신으로 이끌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다. 의도적으로 배신한 것인지 세밀하게 확인한다. 또 대부분 일어난 일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데, 자신을 잘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해결책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또 더욱 명확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또 상담가들은 치유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면서 용서를 위한 길을 찾으라고 권한다. 용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