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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만 노리던 K팝, 대형 사고 치다

사진=게티이미지


미국 로큰롤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2009년 1월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취임 축하공연에서 흑백 혼성 성가대와 함께 ‘더 라이징’을 부르고 있다. AP뉴시스


영국 펑크록 밴드 클래시의 1979년 앨범 ‘런던콜링’.


사진=게티이미지




#2008년 1월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명소 ‘내셔널 몰’.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버락 오바마의 취임식 축하 공연이 열렸다. 이 무대의 마지막 순서는 예순이 넘은 ‘로커’ 브루스 스프링스틴 차례였다. 그가 부른 노래는 ‘더 라이징(The rising)’이었다. 300년밖에 되지 않은 미국의 역사에 기록된 무수한 사건과 좌절, 그리고 이를 딛고 일어선 보통 미국인의 고군분투를 그린 노래였다. 스프링스틴 뒤에는 교회 성가대 합창단이 코러스를 넣고 있었다. 청바지와 티셔츠, 작업복 외투를 걸친 스프링스틴과 정말 ‘미국적인’ 차림새였다. 공연장에 모인 청중 40만여명은 후렴구를 열창했다.

#1979년 런던 소호거리의 라이브클럽. 다 떨어진 티셔츠와 검은색 바이커재킷, 아무렇게나 입은 진바지 차림의 젊은이 네 명이 무대에 올랐다. ‘아이 포우트 더 로(I Fought The Law)’를 불렀다. 자메이카 이민자들의 리듬 ‘레게’를 깔고 단순한 세 개의 기타 코드로 1950년대 흑백차별에 항의하던 흑인 작곡가 겸 가수 소니 커티스의 노래를 리바이벌한 것이다. 예술학교 동창생 네 명이 만든 밴드 ‘클래시’는 이후 팝음악 역사상 가장 ‘심각한’ 형태의 로큰롤 ‘펑크(punk)록’의 시조란 평가를 받는다.

#1963년 10월 스무 살을 갓 넘긴 밥 딜런은 뉴욕의 한 녹음실에 쳐박혀 ‘해티 캐럴씨의 쓸쓸한 죽음(Lonesome Death Of Hattie Carroll)’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그해 메릴랜드주 찰스카운티의 한 호텔에서 하우스메이드로 일하던 50대 흑인 여성 해티 캐럴이 20대 담배농장 백인 갑부에게 “기분 나쁘게 성가시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맞아 죽은 사건을 담은 것이다. 노예 해방이 이뤄진 지 200년이 넘었어도 기승을 부리던 흑백차별 제도와 선입견을 질타한 노래였고, 미국 전역에 인종차별 철폐 여론을 지폈다. 3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딜런의 이 노래는 지금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196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주도한 비폭력 인종차별 철폐운동의 행진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은 1900년 미국 남부지역 교회에서 널리 애창됐던 찰스 앨버트 틴들리의 흑인영가였다.

대중음악, 20세기 최고의 선물

역사학자들은 대중음악을 “20세기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일반 서민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평가한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주자와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연주되던 음악, 격식을 갖춘 정장을 입고 오페라하우스나 음악관에 가서 들어야 했던 ‘이전 시대까지의 음악’을 쉽고 짧고 간단하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의미에서다.

그렇다고 대중음악을 클래식보다 수준이 낮고 한심한 음악이라 여기는 학자나 전문가는 더 이상 없다. 대중음악 스스로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사회 통합과 여론 형성의 주된 도구로 승화됐기 때문이다.

현대 대중음악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미국 흑인문화라고 한다. 노예생활을 하던 흑인들이 혹독한 현실의 서러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부르던 노동요가 블루스가 됐고, 즐거울 때 연주하던 아프리카 리듬의 음악이 재즈가 됐으며,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 합창하던 노래가 흑인영가, 즉 가스펠(Gospel)이 되고, 소울(Soul)이 됐다.

이런 흑인들의 하위문화(sub-culture)는 미국 백인사회를 자극했고, 세련된 백인 감각과 합쳐져 새로운 대중음악이 탄생했으며, 이 대중음악은 기성 클래식 음악을 단번에 제압해버렸다. 초창기 거칠던 블루스는 각종 백인 음악의 작곡 및 연주기법과 합쳐져 이제는 전문적인 감상곡의 위상을 차지했다. 재즈 역시 댄스홀의 춤곡에서 클래식 음악보다 더 추상적인 감상용 연주곡이 됐다. 정치가 귀족과 평민이란 신분제 사회를 벗어던지자 음악도 귀족들만 제공받던 유희에서 탈피해 누구나 듣고 누구나 연주하며 누구나 감상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고소득 서비스산업의 명암

그러자 음악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낳는 고소득 서비스산업으로 탈바꿈했다. 인기 가수와 밴드는 돈방석에 앉았고, 이들의 뒤를 봐주는 매니지먼트 회사와 음반·음원 회사는 더 많은 돈을 거머쥐었다. 수많은 재료와 기술, 자본이 투입되는 2차산업에 비해 음악 비즈니스는 훨씬 더 수월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이 됐고, 너도나도 대중음악산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 현상은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한국은 ‘대중음악=오로지 부가가치 생산’ 등식이 심하게 두드러졌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 나섰던 스프링스틴은 70년대부터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활동해온 전형적인 로큰롤 가수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의 노래는 9·11 테러로 다친 미국인의 정신적 상처를 봉합하고, 삼류 인생을 살아가는 평균 이하 미국인에게 희망을 주며, 어떤 게 옳고 그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노벨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들은 여전히 미국 지식인들에겐 ‘도전해볼 만한 정신적 선구’로 여겨진다. 펑크록 밴드 클래시의 음악은 전 세계 진보정파에게 여전히 영감을 불어넣는다. 3~6분짜리 대중가요에 담겼던 이들의 메시지가 그들이 속한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반면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점점 더 돈벌이에 집착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서민의 애환을 자극했던 가요가 뽕짝으로 변했지만, 1945년 광복 이후 뽕짝은 전형적인 사랑노래에 머물렀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한국 사회의 형상을 묘사하지도, 이 사회 안 구성원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했다. 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졌던 포크음악 선풍 역시 박정희 독재의 그늘에서 신음하다 사그라졌다. 90년대 홍대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번졌던 펑크록 열풍도 기성 음악산업계의 천대 속에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당시 인디밴드운동을 이끌던 독립음반제작사 관계자는 “젊은세대의 사회적 불만과 삶에 대한 각성이란 주제로 꽤 심각한 노래를 만들던 싱어송라이터가 많았지만 기성 음악계가 외면하니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미로에 빠진 한국 대중음악 K팝

90년대부터 자리 잡기 시작한 매니지먼트 회사 중심의 음악산업은 2000년대 들어 케이팝(K-Pop) 열풍으로 이어졌다. ‘칼’ 안무와 경쾌한 리듬, 조각 같은 외모를 갖춘 아이돌 그룹이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까지 인기를 얻자 음악 비즈니스는 증권가의 투자 대상 1호가 될 정도로 ‘황금알을 낳는 비즈니스’로 통하게 됐다.

외모와 안무가 ‘되는’ 아이돌 그룹이 따로 있고, 이들을 기획하고 구성하고 선발하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따로 있으며 곡을 주는 작곡가, 가사를 주는 작사가가 별도로 움직인다. 네 개의 요소가 잘 결합하면 ‘대박’을 치고 돈방석에 앉는다.

문제는 모든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바로 이 대박만 노린다는 것이다. ‘버닝썬 사건’은 이런 한국 음악산업의 얄팍한 근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사건이라는 게 문화평론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어릴 때부터 돈벌이용 음악에 집착해온 아이돌 그룹의 맴버가 ‘돈 된다’면 술집 차리기는 물론 닥치는 대로 유흥산업 투자와 유치에 혈안이 돼 불법을 저지른 사건이란 평가다.

한 대중음악평론가는 “케이팝이 소위 돈 되는 노래와 멜로디만 찾으니 대중들이 쉽게 흥분하고 쉽게 도취됐다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노래와 음악만 찾게 됐다”면서 “그러니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점점 더 말초적인 시대의 배설구가 돼 가는 셈”이라고 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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