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 윤모(29)씨는 지난달 22일 ‘식사를 거르겠다’는 각오를 하고 점심시간 사무실을 나와 서둘러 서울 명동으로 향했다. 이날은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가 영국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 JW앤더슨과 협업(컬래버레이션)한 제품을 출시하는 날이었다. ‘이건 꼭 사야 해’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패션 피플의 ‘인싸템’(인사이더+아이템) 출시일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윤씨는 이날 득템에 실패했다. 평일 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 그는 “사원증 목에 걸고 초조하게 줄 서 있는 다른 직장인들을 보고, 도저히 점심시간 안에 살 수 없을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면서도 “며칠 지난 뒤 사긴 샀다”고 말했다.
패션계의 ‘협업 열풍’이 식지 않고 있다. 최근 3~4년 동안 국내외 패션업계를 술렁이게 한 건 다양한 양상의 컬래버 제품들이었다. 특히 2017년 고고한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루이비통×슈프림’ 한정판 제품들은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끝내 사지 못한 경우 웃돈을 얹어서 중고제품을 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루이비통×슈프림’의 성공은 패션 분야의 컬래버 열풍에 힘을 더해줬다. 협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범위도 넓어졌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29일 “‘3초백’으로 불리며 식상해진 루이비통이 슈프림을 입고 ‘힙’해졌다. 루이비통 팬과 슈프림 팬 모두를 사로잡으며 컬래버의 잠재력을 업계에 다시금 확인시켜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패션업계에 드리워진 불황의 그림자를 협업 제품들은 가뿐히 밀어내고 있는 상황이다.
패션 분야의 컬래버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브랜드 간 협업이다. ‘루이비통×슈프림’ ‘펜디×휠라’ ‘유니클로×JW앤더슨’ ‘컨버스×언더커버’ ‘크롬하츠×오프화이트’ 등 명품이나 유명 브랜드가 SPA브랜드, 스트리트 브랜드, 스포츠 브랜드 등 언뜻 서로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브랜드와 컬래버 한정판을 내놓는 식이다.
국내에서는 패션 브랜드 간 협업보다는 생활용품 브랜드나 식품 브랜드 등 경계를 넘어선 컬래버 제품들이 더 많은 편이다. 이랜드 스파오와 빙그레 메로나, 빈폴스포츠와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마일리, 신세계백화점 분더샵의 케이스스터디와 SPC 쉑쉑버거의 컬래버 등이 유명하다.
‘브랜드×아티스트’ 방식도 흔히 이뤄진다. 신세계톰보이 남성복 브랜드 코모도의 ‘러브’ 컬렉션은 뉴욕의 젊은 아티스트 커티스 쿨릭과 협업해 출시 때마다 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쿨릭이 디자인한 ‘LOVE’라는 글자 디자인이 담긴 이 컬렉션은 2017년 처음 나온 이후 ‘출시되자마자 완판’이라는 기록을 쓰고 있다. 라코스테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과의 컬래버 컬렉션을 최근 출시했다. 셔츠, 스니커즈 등에 키스 해링의 대표적인 작품 ‘짖는 개’와 ‘하트’ 드로잉을 담아냈다.
최근엔 ‘브랜드×콘텐츠’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애니메이션, 소설, 영화, 인물을 패션 아이템으로 재탄생시킨 컬래버 제품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랜드가 콘텐츠와 다양한 협업 제품을 내놔 1020세대를 공략해 성공을 거뒀다. 지난해 11월 출시된 ‘스파오×해리포터’ 제품들은 온라인몰에서는 1분 만에 3만장,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2시간 만에 품절됐다. 출시 당일 25만장이 완판돼 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스파오는 지난해 9월 배우 김혜자씨와 협업해 경량패딩, 플리스 집업 등 ‘혜자템’이라 불리는 한정판 제품을 출시해 한 달 만에 20만장을 판매했다.
협업이라는 날갯짓은 업계에서 시작됐지만 업계를 들썩이게 한 것은 소비자들이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즐기는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생)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콜라보’를 찍으면서 협업 제품들은 종종 ‘인싸템’으로 등극하게 됐다.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강렬한 ‘한 장’을 실어줄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가격도, 브랜드의 기존 이미지도 중요하지 않다. 색다르고 재미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게 컬래버 마니아들의 설명이다. 고루한 이미지의 브랜드도 잘된 협업을 통해 단숨에 힙하게 바뀔 수 있다.
희소성이 주는 가치도 소비자들을 끌어당긴다. 대부분의 컬래버 제품들은 한정판이다. 이들 제품을 종종 모으는 신모(24)씨는 “우리나라에 이 제품을 가진 사람이 얼마 없다는 점이 컬래버 제품이 주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패션 분야의 협업은 매출로 즉각 연결되지는 않는다. 대량생산, 대량판매는 협업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대부분 한정판으로 내놓는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킬 수 없어 매출 증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업계가 다양한 협업 제품을 내놓는 것은 이슈를 만들어 새로운 소비자를 유입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충성도 높은 소비자들을 늘릴 수 있다는 게 협업의 중요한 이점이다. 브랜드 자체에 색다른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기존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장에 어필하게 된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기존 브랜드의 변신은 흥미롭고 즐거운 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가치와 경험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을 겨냥해 패션 브랜드마다 다양한 협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