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혁(22)은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게이머다. 본명보다 ‘페이커(Faker)’라는 게임 아이디로 더 유명하다. 전 세계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게임의 신(神)’으로 불리는 그는 중국 북미 등지에서 케이팝 스타 이상의 인기를 누린다. 비결은 독보적인 게임 실력이다. 2013년 프로게이머로 데뷔해 일곱 번의 국내 대회와 세 번의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를 ‘e스포츠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부른다.
전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상혁의 소속팀 SK텔레콤 T1은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국내 최대 e스포츠 프로대회 ‘2019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의 스프링 시즌 결승전에서 그리핀을 세트스코어 3대 0으로 제압했다. 이상혁은 이날 승리로 생애 일곱 번째 국내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이상혁을 만났다. 짧게 휴가를 보낸 뒤 숙소로 복귀했다는 이상혁은 “선수단 개편 이후 첫 시즌이었다. 동료들과 호흡을 맞춘 지 얼마 안됐다”며 “어려운 시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스프링 시즌일 뿐이고, 앞으로 서머 시즌과 국제 대회가 남아있다. 남은 경기를 잘해야 한다”며 올해 모든 우승 트로피를 독식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롤드컵 최다 우승(3회) 기록을 보유한 이상혁은 여전히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제 경기력에 아쉬운 부분이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며 “분명히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기량 향상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프로게이머는 직업 수명이 짧은 편에 속한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면 노장 취급을 받는 기이한 직업이다. 이상혁처럼 6년 동안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상혁은 꾸준히 기량을 유지해온 원동력으로 엄격한 자기 관리와 향상심을 꼽았다. 그는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 항상 어떻게 하면 게임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지낸다. 또한 계속해서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도 대회 영상을 챙겨볼 정도로 실력 향상에 대한 열의가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상혁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특히나 절치부심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서머 시즌을 7위로 마친 그는 “지난해 성적이 좋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 휴식을 취하며 올해를 어떻게 준비할지 많이 생각했다”고 돌아보면서 “어떻게 보면 좋은 약이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올해가 굉장히 중요한 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를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올해는 꼭 우승하겠다는 각오였다”고 덧붙였다.
사실 국내 챔피언 타이틀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다시금 국내 정상에 올랐으니 이상혁은 이제 세계 챔피언 재탈환을 노린다.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건 2017년이 마지막이다. 이상혁은 오는 5월 베트남에서 열리는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에 참전, 전 세계 지역 챔피언들과 실력을 겨룬다. 그는 이 대회를 제패하고, 오는 10월 유럽에서 열리는 롤드컵까지 우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MSI는 수능 시험 전에 치르는 모의고사 같은 느낌이다. 그간 MSI에서의 성적이 롤드컵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굉장히 중요한 대회로 본다. 또한 롤드컵은 어떻게 보면 마라톤과도 같다. 롤드컵 때 자연스럽게 좋은 경기력이 나오도록, 남은 기간 최대한 좋은 습관들이 몸에 배도록 하겠다.”
이상혁과 같은 정상급 프로게이머들은 늘 우승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상혁은 숙면과 독서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다. 그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명상 비슷하게 잠시 생각을 멈춰보는 시간을 갖는다”며 “잠도 많이 자는 편이다. 숙면을 취하면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해소된다. 또한 시즌 중에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하지만, 독서도 최대한 많이 하려고 애쓴다”고 설명했다.
이상혁의 책 사랑은 남다르다. 경기를 치르지 않는 자투리 시간이면 늘 책을 읽는다. 평소에도 책을 품고 다닌다. 인터뷰 장소에는 인지과학 서적 ‘감각의 미래’(카라 플라토니 지음)를 끼고 왔다. 최근 철학 쪽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상혁은 “책은 가려 읽는 편이 아니다. 최대한 식견을 넓히려고 한다”고 전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는 없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 ‘월든’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이상혁은 추후에 직접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실 간단한 일기나 계획표 등을 써볼 생각은 갖고 있다”면서 “언젠가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도 앞으로는 글쓰기를 실천해보려고 한다. 지금도 최소한 맞춤법은 안 틀릴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먼 훗날 프로게이머를 은퇴한 뒤 회고록을 쓸 생각은 없는지 묻자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커리어(경력)를 남겨야 할 것 같다”고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e스포츠 역사상 최다 우승자로 꼽히는 이상혁이지만, 그는 “우승 커리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앞으로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혁의 경쟁자는 자기 자신뿐이다. 그는 “지금은 제 기량이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서도 “하지만 세계에서 LoL을 제일 잘하는 선수를 이야기할 때, 나는 내가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노력하는지에 따라 답이 나뉠 것”이라고 전했다.
젊은 베테랑은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갈 생각이다. 향후 계획을 묻자 이상혁은 “아직 프로게이머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해도 될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늘 응원해주시는 팬들께 감사하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윤민섭 이다니엘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