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하노이 노딜’이 가져온 가장 큰 파장을 꼽자면 과거 외교문법으로의 회귀다.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한반도 데탕트를 이끌어온 건 ‘톱다운’ 외교의 힘이었다. 하지만 불가역적 진전을 이룰 것이라 예상됐던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면서 판이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 북·미 협상은 일본을 제외한 옛 6자회담 당사국으로 확장되고 있다. 애초 남·북·미 3자 속도전을 추진했던 정부 입장에서도 이제는 플랜 B를 검토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 실무협의 중심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번번이 실패했다. 불신만 가득한 북·미가 신고·검증·사찰·폐기 과정을 함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경험칙으로 확인됐다. 문재인정부가 내세운 톱다운 외교는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정상 간 신뢰를 구축해 한방에 최종 목표로 나아가려는 구상이었다. 독재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연임 가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합의한다면 그 자체로 불가역적이라는 계산이 서 있었다. 하지만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면서 톱다운 외교에 의구심이 제기됐다.
북·미 정상이 회담장에서 등을 돌리고 나오는 모습은 국민에게 생각보다 많은 절망감을 주었다. ‘역시 안 되는구나’라는 불신은 ‘청와대 밖’의 목소리, 과거 외교 프로토콜을 불러오게 된다. 실무 협상의 부재 위에 만들어진 정상 간 합의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바텀 업’ 방식의 북·미 기싸움은 여러 잡음을 불러일으키며 시간만 잡아먹을 것이다. 이렇게 흘러가면 당연히 청와대가 원하는 속도전은 불가능해진다. 1박3일 초단기로 미국을 방문해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톱다운의 유효함을 인정받고 돌아온 것도 이래선 안 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 위원장은 러시아까지 끌어들였다. 원래 문재인정부의 구상은 남·북·미 3개의 바퀴를 통한 속도전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네 차례나 중국을 찾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열면서 중국 역할이 확대됐다. 정부 안에서 볼멘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남·북·미·중 4개 바퀴를 적절하게만 굴린다면 조기 성과도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러시아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2003년 6자회담 태동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2009년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언론 회고에 따르면 미국은 베이징에서 북·미·중 3자 회동을 개최한다. 그리고 북·미 단독 회담은 실리가 없다고 보고 남·북·미·중·일 5자 회담을 제안한다. 정 전 장관은 북한에 “미국이 3자 회담을 해보더니 절대 당신들을 단독으로 안 만난다고 한다. 5자회담에 나가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도 이미 미국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정 전 장관은 “중국이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으니까 6자회담 방식은 어떠냐”며 “중국이 미국 심부름만 하는 건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고, 북한이 받아들였다. 지금 북한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고, 북·미 협상 주도권 확보를 위해 사회주의 연합을 공고히 하려는 차원일 수도 있다.
어쨌든 협상장에 나온 김 위원장도 명운을 걸고 한반도 운전석에서 균형외교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남측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시그널은 아닌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에 별다른 답이 없다. 4·27 판문점 선언 1주년 남북 공동행사에도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의 다자 정상외교전을 꾀한다면 미국의 지분은 줄어들고, 정부의 입지도 축소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다자 북핵 정상외교전을 이끌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원 오브 뎀’으로 전락해 6자회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지 걱정되는 요즘이다.
강준구 정치부 차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