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골퍼 이정은(23)은 수년 전 기자에게 “골퍼로서의 목표는 내 다리같은 가족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골프계에서 이정은은 ‘효녀’로 불린다. 여느 또래 골퍼들과 달리 어릴적부터 가난을 사무치게 느꼈고, 가족애를 통해 역경을 극복한 보기 드문 케이스의 소유자다.
외동딸인 이정은은 ‘소녀 가장’이다. 아버지 이정호씨가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덤프트럭 기사로 일했지만 이정은이 4살 때 트럭이 30m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세 식구의 수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생각한 게 골프였다. 골프를 배워 레슨 프로가 돼 부모님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게 불과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막상 골프를 시작했지만 가난 때문에 새 골프채를 살 엄두도 못냈다. 그래서 10년 지난 골프클럽으로 연습했다. 고교 2학년 때 국가대표가 된 것은 천운이었다. 국가대표가 돼 합숙 훈련을 하면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의 효심으로 힘을 얻은 아버지는 탁구 라켓을 잡고 2012년과 2013년 장애인 전국체전 복식에서 금메달, 2017년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장애인 탁구 ‘고수’가 됐다.
그렇게 이정은은 201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데뷔했다. 물론 대회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장애인용 승용차로 직접 운전해 딸을 경기장에 데려다줬다. 결국 남다른 책임감과 성실성, 가족애로 금방 스타가 됐다. 그해 신인왕이 됐고, 이듬해에는 대상, 상금왕, 다승왕 등 6관왕이 됐다. 이정은이 번 돈으로 제일 먼저 한 게 아버지에게 전동 휠체어를 선물한 것이다.
이정은은 지난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 있는 부모님 걱정에 이를 미뤘다. 하지만 지난해 상금왕과 최저타수상을 받는 등 더 이상 국내에서 적수가 없어지자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부모님도 “우리 걱정은 말고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이정은은 미국무대 진출 이후 우승을 따내지 못했지만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가 지난 주 열린 퓨어실크 챔피언십에서 이정은은 미국 진출 후 가장 낮은 성적인 26위에 그쳤다. 하지만 이정은과 부모님은 서로 다독이며 위로했다. 이정은이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부모님과의 카카오톡 대화에서 아버지는 “네가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이에 이정은은 전라도 사투리로 “그라제. 그거시 행복이제(그렇지 그게 행복이지)”라고 화답했다.
결국 부모님의 사랑에 힘을 얻은 이정은은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컨트리클럽 오브 찰스턴(파71·6535야드)에서 막을 내린 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최종합계 6언더파로 유소연, 에인절 인, 렉시 톰슨(이상 미국) 등을 2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LPGA 투어 첫 승을 메이저로 장식한 것이다.
이정은은 또 이번 시즌부터 상향 조정된 우승상금 100만 달러(11억9000만원)도 챙기며 상금랭킹이 1위로 수직 상승했다. 이정은은 또 이 대회를 제패한 9번째 한국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정은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항상 헌신적으로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께 너무나 감사하다”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항상 승리한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즐기면서 노력하는 와중에 이렇게 큰 선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