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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같이 고민해 봅시다





세상에는 답이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어쩌면 원래부터 답이 없었는데도, 답이 있다고 믿으며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인간은 그것이 오류든 아니든 상관없이 믿을 것이 있어야 안심하는 존재라고, 버틀란드 러셀도 말하지 않았던가.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당장 당신의 답을 내놓아라”고 물어오는 장면에 처하면, 나는 괴롭다. “답을 잘 몰라서…”라는 게 첫 번째 이유이지만, 교과서 밖의 인생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답이란 게 애당초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부터 답이 없다고 믿는 쪽이다. 그렇다고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만, 한 존재를 고민에 빠뜨리는 질문에는 대개 답이 없는 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하고 (그럴듯한 말로 현혹하는) 멘토에게 “길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것 역시 자기 마음에 뭐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열망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약한 인간은 그래야 안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위로라는 착각의 감정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 경험이 아무리 많고 지혜가 아무리 충만한 사람이라도 삶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하는 조언을 따르라”는 외부의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옳아 보여도 내 마음에 들어오면 쓸모없어진다.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이 유효한 법이다. 무엇보다 확신에 찬 조언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말을 한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몇 달 동안 진료를 해 왔던 사람이 “그동안은 말하지 않았는데…”라면서 자신이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며 오래 묵은 고민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그리고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질문에 절박함이 묻어나서 이런저런 답을 내놓긴 했지만, 올바른 답이 될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고통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애쓰기보다 “같이 고민해 봅시다”라고 한다. “함께 고민해 보자”는 말처럼 든든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섣부른 대답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같이 고민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힘을 얻는다.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절실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잘나든 못나든, 상처투성이든 아니든 ‘내 안에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힘든 거구나. 절실히 바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걸 잊고 살아서 이렇게 아픈 거구나’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데서 비롯된다. 고민한다는 건, 자신을 절실하게 느껴가는 과정인 것이다.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해서 날씨가 좋으면 무조건 걷고 싶어진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걷는 법은 별로 없다. 지도도 보지 않는다. 그냥 걷는다. 느낌이 가는 대로 좌우를 정하고, 호기심이 가는 곳이 있으면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리고, 눈에 띄는 건물이 보이면 잠시 멈춰서서 한참을 관찰한다. 그러다 또 걷고 싶어서 다시 움직이다 보면 어딘가에 닿아 있다. 그러고 나면 ‘아, 내가 이렇게 저렇게 걸어와서 지금 이곳에 닿아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다. 거창한 목적지에 닿은 것도 아니고, 인생의 소중한 해답 같은 걸 얻지는 못했지만 걸어왔던 길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해보면 ‘아, 그래 삶이란 이런 거지’라고 느끼게 된다. 거창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더라도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고민은 이렇게 산책하는 것과 같다. 지도 없이 하는 산책이 고민이다. 뚜렷한 목적지를 정해놓고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시야를 틔워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같이 고민해준다는 것은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정답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얻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빨리 답에 이르려고 하거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기보다 이리저리 돌려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심사숙고하는 프로세스가 진짜 소중한 것이다. 비록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분명 지혜는 얻게 될 테니까 말이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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