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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망은 과연 성령에 뿌리내리고 있는가”



제임스 스미스 교수는 날카로운 문화비평으로 주목받는 기독교 철학자 이다. 청중 한 명이 제임스 스미스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 평생 기울였던 선교적 헌신은 사실 당신의 야망을 채운 것일 수 있습니다.”

제임스 스미스 교수(사진·미국 칼빈대학교 철학과)가 한국의 대학 선교단체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공개 강연에서 던진 말이다. 선교에 대한 열심, 전도를 향한 열정,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그 순간조차 어쩌면 ‘가짜’일 수 있다는 경고에 몇몇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문화비평으로 저명한 스미스 교수가 5월 내한해 수차례 강연했다. 강연마다 주제는 달랐지만, 질문은 겹쳤다. “당신의 실천들이 나오는 근원은 무엇인가요?” 모든 강연에서 청중을 집중하게 했던 물음이었다.

그는 이 질문을 조금씩 비튼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내가 의식하는 갈망이 알고 보니 나의 진정한 갈망이 아니라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갈망했으나, 자장면이 나온 뒤에야 내가 진정 원했던 게 짬뽕이었음을 깨닫는다.

사역의 영역으로 가보자. 내가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대상과 내가 진짜 헌신하는 ‘대상’은 다를 수 있다. 헌신이라 생각한 여러 사역이 사실은 내 야망에 봉사하는 흉측한 실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소망이 정말 성령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지렛대 삼아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강연들을 정리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대상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다. 그중에서도 ‘습관’을 보면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에 헌신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습관은 무의식중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습관은 ‘두 번째 본성’이다. 습관은 우리의 본성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작동한다.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고 행동한다.

습관이 곧 당신이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깨우는 우리 모습을 떠올려 보자. 대수롭지 않게 휴대전화로 어딘가에 접속하는 이 작은 행동이 대표적인 습관이다. 세상을 측정하고, 스캔하고, 구부리고, 확대하는 작은 손놀림들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을 형성한다. 삼삼오오 대화할 때도 한두 사람 이상은 꼭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작은 습관들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기계와 어떻게 서로 관계 맺는지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합니다. 이 작은 기계를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도록 기대하는 욕망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습관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좋은’ 습관은 어떻게 습득할 수 있을까? 훈련과 교육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도덕실천을 가르칠 때 상벌을 주는 이유는 그가 선함을 내면화하여, 자연스럽게 선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기 위함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리면, 습관은 실천을 통해 습득할 수 있다.

습관을 습득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자동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지향과 헌신을 본능적으로 내면화했다는 의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습득한 본능이 어디를 지향하는가이다.

예배를 향하는 본성

우리 삶을 거룩한 곳에 뿌리내리게 하는 습관은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 습관은 적당한 언어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오직 실천적 지식으로만 형성된다.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사랑과 예배의 대상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바른 예배를 통해 바른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 예전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습관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실천이다. 기독교 예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습관의 훈련장이다. 내가 무엇에 굶주리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는 예전의 자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단순히 교회에 오래 머물고, 예배를 반복하는 습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 예전으로 재연되는 성서의 내러티브를 상상하고, 공동체 안에서 깨어진 이들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며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삶이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예전에 닻을 내리면, 무질서했던 일상이 새로운 습관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소망은 어디로?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한 소망이 정말 성령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대답에 꽤 가까이 왔다. 거룩한 소망과 흉측한 야망의 괴리가 드러나는 자리로 용기 내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추악한 욕망에 빛을 비추고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습관을 형성하는 자리, 하나님을 진정 예배하는 자리로 향해야 한다.

이때 성령은 예배의 자리로 향하게끔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예배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그 걸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뢰해야 한다. 그렇게 첫걸음을 뗄 때 우리의 소망은 성령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함께 보면 좋은 영화 <잠입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년 작

마음속에 품은 욕망을 그대로 이뤄준다는 ‘방’을 찾아나선 교수와 작가 이야기. 이들은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고자 금지된 구역에 잠입한다. 정작 문 앞에 선 둘은 망설인다. “당신이 얻는 것은 당신이 바란다고 생각하는 바가 아니라, 당신이 마음속 깊이 바라는 바다”라는 경고 때문. 두 사람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내가 바란다고 생각한 욕망이, 사실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라면? 혹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될 흉측한 욕망이라면?

◇함께 읽으면 좋은 소설 <데미안> 헤르만 헤세, 1919년 작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이상의 존재인 데미안을 만나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간다는 이야기. 전형적인 성장소설이지만, 성장과정이 아니라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품에서 말하는 성장이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앞에 있는 나’와 ‘뒤에 있는 나’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두 자아, 즉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성장의 시작점이이고 볼수 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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