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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이미 가상세계로 넘어갔다”

한 시민이 스마트폰을 들고 ‘포켓몬 고’ 게임을 하고 있다. 포켓몬 고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겹쳐 보이게 만드는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한 게임이다. 구글 마케터인 주영민은 “(포켓몬 고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상세계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고 말한다. 국민일보DB




이제 ‘가상(假像)’이라는 낱말의 뜻풀이를 바꿀 때가 됐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그 뜻을 ‘실물처럼 보이는 거짓 형상’이라고 규정해 놓았는데, 현대사회에서 가상은 더 이상 허깨비 같은 뭔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가상은 실재를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실재를 변형시키는 현상”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가상은 “실재를 빨아들이며” 끝없이 자가발전을 하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페이스북을 예로 들어보자. 사용자는 이곳에서 “가상의 인격”을 만들어낸다(혹은 페이스북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실제의 인격일 수도 있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뉴스는 반대편 사람들에게 가짜뉴스 취급을 받으며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해 “삶을 기획하고”, 가상 세계에 차곡차곡 쌓인 데이터는 현실 세계를 바꿔놓으면서 감시와 처벌의 근거로 활용된다.

‘가상은 현실이다’는 이렇듯 지금 이 순간에도 급속도로 진행 중인 가상화의 실체를 면밀히 살핀 작품이다. 책을 펴낸 주영민은 구글에서 마케터로 일하면서 개인미디어 ‘주영민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어디서 본 듯하고 누군가 한 듯한 이야기가 적지 않지만 국내 저자가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을 내놓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을 무작정 예찬하거나, 당장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식으로 겁박하지 않는다. 가상화의 풍경을 자세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다. 기술 변화의 세세한 지점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야기의 시작을 장식하는 내용은 클라우드 컴퓨팅이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컴퓨터에서 사용하던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접속하면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다. 이 기술 덕분에 우리는 사진을 별도의 저장 장치에 쟁여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사진을 보고 싶으면 구름(Cloud)처럼 디지털 세계 어딘가에 떠 있는 클라우드에서 내려받으면 된다.

저자는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들은 클라우드 서버로 옮겨가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전환”이라며 “클라우드는 단지 기술기업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아니라, 실제를 떠받들고 있는 가상의 아틀라스”라고 썼다. 클라우드를 이 책의 도입부에 언급한 건 가상화가 바로 이 클라우드를 거점으로 펼쳐지고 있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가상화 혁명의 파워를 실감케 만드는 작품이다. 섬뜩하게 다가오는 내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인터넷이 표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끌차 역할을 하는지 자문해보자. 저자는 “정보의 바다가 우리를 열린사회로 이끌어 주리라는 초기 인터넷의 약속은 틀렸다”고 단언한다. 그가 예시로 드는 건 가짜뉴스다. 언젠가부터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주장 대부분은 가짜뉴스 취급을 받는다. 뉴스는 “모든 정치세력이 자신의 반대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했고, “신념이 사실을 결정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SNS에서 어떤 콘텐츠에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소셜 네트워크는 진공청소기처럼 우리를 편향된 세계로 빨아들인다.”

책을 읽으면 이미 세계의 운전대를 가상의 세계가 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권력은 이미 가상의 세계로 넘어갔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기여한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한때 페이스북을 국영화하려고 했었는데, 이것은 권력이 가상의 세계로 옮겨갔음을 방증한 사례였다. 저자는 “굉장히 긴 시간 단위에서 보자면 인류는 가상을 강화하기 위한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적어두었다.

올해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내다본 미국 MIT 교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명저 ‘디지털이다’가 한국에 출간된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원자’로 구성된 세계가 서서히 뒤집어져 ‘비트’로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정보의 DNA”라고 할 수 있는 비트는 이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SNS는 ‘현실’을 가상화하고, 알파고와 비트코인은 각각 ‘지능’과 ‘돈’을 가상의 무언가로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가상화 혁명의 한복판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가 내놓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을 읽는 새로운 언어의 개발이다. 그를 통해 가상과 실재가 중첩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의 자유는 가상에 포획되지 않는 상상력과 함께, 가상을 역이용하는 상상력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가상과 현실 사이 인간이 건설한 새로운 윤리 역시 이러한 이중적 상상력에서 출발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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