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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도 회심할 수 있도록… 물 흐르듯 ‘감동의 예배’ 온힘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오른쪽)가 2017년 3월 주일 대예배 시간에 교회에 처음 출석한 새신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세계로교회 제공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온 성도가 전도에 집중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변화를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보니 콕 집어서 딱히 뭐라 답해줄 말이 없었다. 곤란해서 얼버무리다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목회 여정을 뒤돌아보니 크게 예배, 직분자, 구역을 바꾼 뒤 폭발적 성장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먼저 예배다. 집에서 자발적으로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 ‘구원받아야지’ ‘예수 믿어야지’ 결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스스로 교회 다니기로 작정한 사람은 100명 가운데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때문에 예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예배순서는 마치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익숙하다. 하지만 비신자의 시선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 가운데 가장 불편한 것이 예배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처음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예수 믿는 것이 참 좋구나’ ‘나도 그 예수 한번 믿어볼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게 1시간 동안 감동이 임하도록 예배를 준비했다.

전도를 받고 처음 예배당에 앉은 사람들은 예배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를 어찌하려고 교회에 데리고 왔지?’ ‘교회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곳이지?’ 이런 마음으로 앉아 어색하게 예배를 드린다.

이런 사람 3명 중 1명이 예배 후 마음이 변해 세례까지 받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으므로 성령님이 그 영을 건드리기만 하면 달라진다. 교회에 들어올 때는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몰라도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다.

대다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의 ‘묵도-찬송-기도-찬송’과 같은 순서가 자칫 회중에게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배 시간 내내 일어섰다 앉았다 기도했다 찬송하는 것 역시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앉았다 일어서는 순서를 없앴다.

예배 인도자가 “누가누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처럼 중복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했다. 대표기도는 1분 30초를 넘지 않게 했다. 중언부언 기도하면 듣는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대표기도는 간결하면서도 성령님이 임재하시도록 강력하게 해야 한다. 정성을 다해 한 문장 한 문장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도록 기도할 때 회중도 은혜를 받는다.

부산 세계로교회는 성가대가 없다. 대신 누구든지 1개월 전에 특별찬양을 신청하면 특송을 할 수 있다. 특송이 끝나면 청년 찬양팀이 나와 손뼉을 치며 회중들과 함께 힘있게 찬양한다. 설교 전 5분 동안 성도들이 간증하는데, 자신이 예수 믿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었으며 믿고 난 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한다. 이 시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설교는 방송설교 시간에 맞춰 24분 동안 한다. 매주 30~50여명이 새가족으로 등록하는데, 찬양단이 화분을 주며 축하한다. 교회에서 화분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새신자이기에 온 성도가 정성으로 맞아준다. 그리고 헌금기도와 축복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1초도 쉼 없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한다. TV 광고를 보면 한 회당 길어야 15~20초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2초간 화면이 하얗게 나온다면 방송사고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드리는 예배는 어떨까.

간증이 주일 예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교회는 철야기도회가 없는 대신 수요일에 심야기도회를 갖는다. 기도회 설교를 마치면 3명이 올라와 간증한다. 특히 맨 마지막 간증자는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가 맡는다.

간증의 내용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때론 예수를 믿게 된 계기를, 때론 은혜받은 간증을 하기도 한다. 어떻게 은혜를 받게 됐는지, 어떻게 신앙의 결단을 하게 됐는지 간증한다. 간증을 마치면 온 성도가 뜨거운 마음으로 손뼉을 쳐준다. 비록 새신자라 할지라도 간증을 한 사람이 기도회를 인도한다. 첫 번째 간증자가 기도회를 인도하고 내려오면 두 번째 사람이 바로 이어서 간증한다. 그렇게 간증을 나눈 후 또다시 통성으로 기도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말씀을 들으면서, 간증을 들으면서, 찬양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처럼 온 교인들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면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 수많은 회심이 일어나고 죽은 영혼들이 살아난다. 은혜롭고 매끄러운 예배가 되도록, 명품 예배가 되도록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불교는 현존하는 것만 추구

전도자: 선생님은 종교가 무엇입니까.

대상자1: 불교입니다.

전도자: 네, 불교를 믿으시는군요. 그런데 김 선생님, 고려 시대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믿었잖아요.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제사를 지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자1: 네? 무슨 말씀입니까.

전도자: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했지만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내세나 윤회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상을 만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도 못 하도록 유언했습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 태조 이성계가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를 버리고 중국에서 유교를 도입했습니다. 이성계는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우고 왕이 됐지만, 또다시 난이 일어날까 두려워했습니다. 정도전을 통해 불교를 배척하고 힘 있는 자에게 충성하는 유교를 국교로 삼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제사는 불교가 아니라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성철 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모르십니까.

대상자1: 처음 듣는 말입니다.

전도자: 그러나 사실입니다. 김 선생님, 알고 보니까 선생님은 불교를 믿은 게 아니라 유교를 믿고 있었군요.

대상자1: 그건 아닌데요.

전도자: 이 선생님도 불교를 믿는다고 하시던데 제사를 지내나요.

대상자2: 예, 그렇습니다.

전도자: 그렇다면 이 선생님은 불교를 믿는다면서 실제로는 윤회설을 주장하는 힌두교와 제사를 지내는 유교도 믿고 완전 짬뽕으로 믿고 살았군요.

대상자2: 거 참, 알고 보니 짬뽕으로 믿고 살았네요.

전도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영향력이 큽니다. 그렇지만 불교인들도 불교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붓다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시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심오한 철학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도 아니요 구원자도 아니며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애썼던 안내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불교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요, 인간학이요, 휴머니즘입니다.

불교를 연구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통 불교와 지금 한국불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일찍이 성철스님도 봉암사 결사를 통해 석가모니가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내용을 배척하자고 결의까지 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법당 운영이 되겠느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으나 붓다가 말하지 않고 붓다가 가르치지 않은 것은 불교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개혁적인 불자들이 “우리가 믿는 바가 불교냐, 힌두교냐”라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아직도 대다수가 침묵만 하고 있습니다. 불교 강남포교원의 성열 원장이 쓴 ‘붓다 다르마’와 수많은 인도인을 불교로 개종시킨 암베드카르의 ‘인도로 간 붓다’를 보면 붓다가 무엇을 말했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붓다 다르마’에 보면 ‘불교는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개념이 없으니 불교는 인간학이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붓다는 “나는 오직 여기 현존하는 것만을 추구하는데 너희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슬퍼한다”고 말해 현존하는 것을 추구할 뿐, 과거의 문제나 사후의 문제와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삶 전체를 통해 수도 없이 반복돼 설파됐던 말씀입니다.

붓다는 자아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유명무실한 것이니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망상이라 했습니다. 붓다가 형이상학의 문제에 침묵했던 것은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선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인식적 입장에서 볼 때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장난이라고 봤습니다.(계속)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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