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황홀이라는 집 한 채였다
램프를 들어 붉은 반점이 어룽거리는 문장을 비췄다 인화성이 강한 두 개의 연료통이 엎어지고 하나의 기술이 탄생했다 두 점, 퍼들대는 얼룩은 일치된 의지로 서로에게 스미었다 무풍지대에서도 불꽃은 기류를 탔다 불꽃은 불꽃을 집어삼키며 합체됐다 불꽃 형상을 한 혀에 관한 속설이 꿈속에서 이루어졌다 한 줄, 문장이 타올랐다 나는 심연처럼 깊게 타르처럼 고요하게 끓을 것이다
조정인의 시집 ‘사과 얼마예요’(민음사) 중
저토록 관능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시는 이번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1998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그동안 시집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를 출간하며 명성을 쌓았다. 전작들이 그랬듯 이번 책에서도 그는 감각적인 언어로 삶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작가의 말’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말은 깃든다. 비쳐 든다. 말들은 스스로 가냘픈 질서를 세우고 연합한다. 그리고 태어나는 문장들. 어떤 문장은 그 자신의 기쁨으로 숭어처럼 솟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