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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우리에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준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소설가 김애란. 그는 “언젠가 스케치를 하듯이 누군가의 삶을 글로 남겨보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 산문집을 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병주 기자




소설가에게 에세이는 화투판의 우수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게 에세이여서다. 글쓰기의 진검승부야 소설로 하면 되니 전력을 다해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편한 마음으로 에세이를 써놓았다가, 청탁을 받아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를 했다가, 원고가 쌓이면 책으로 엮어 펴내곤 한다. 그래서 한국의 어지간한 중견 작가 대부분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산문집 몇 권쯤은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 2002년 등단해 ‘달려라, 아비’를 시작으로 내놓는 소설마다 대단한 호평을 10년 넘게 받아왔는데 이제야 첫 산문집을 출간했다. 작가 이름은 김애란(39), 그가 내놓은 책의 제목은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이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김애란은 “내 소설 바깥에 있던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글들”이라고 소개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발표한 산문을 모은 책이에요. 글마다 꽤나 시간을 들여서 썼던 거 같아요. 산문집은 작가가 (소설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더 솔직한 책일 텐데, 산문집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정말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에세이보다 소설을 통해 해왔구나.’”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됐다. ‘나를 부른 이름’(1부) ‘너와 부른 이름’(2부) ‘우릴 부른 이름들’(3부) 순으로 이어지는데 그의 팬이라면 작가의 인생 스토리가 담긴 1부에 눈길이 갈 것이다. 1부에는 어머니가 운영한 국숫집 ‘맛나당’ 이야기를 시작으로 작가의 삶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다.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드는 글이 한두 편이 아니다. 부모님의 연애담을 소상하게 밝힌 ‘나의 기원, 그의 연애’ 같은 작품이 그렇다. 1977년 충남 서산에 있는 이것저것 다 파는 구멍가게에서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청춘남녀는 ‘뽕(화투)’을 치다가 눈이 맞았다. 숙맥 같은 아버지는 6개월간 뜸을 들이다 만취 상태에서 덥석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조양, 인간을 그렇게 오래 저울질하는 게 아니유. 나 김정래란 사람을 한 번 믿어보시유.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유.”

그렇다면 어머니는 당시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땐 느이 아부지 안됐단 생각만 했지, 지금도 이렇게 술을 마셔대면 나중엔 얼마나 더 처먹을까 하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내가.”

김애란은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부모님께 산문집을 보내드리진 못했다고 했다. “부모님께 선물해드리는 느낌으로 쓴 글이 제법 있어요. 부모님 이야기가 담긴 부분은 책에 ‘여기 아버지 어머니가 나오는 곳이에요’라는 포스트잇을 붙여서 보내드릴 생각이에요.”

‘잊기 좋은 이름’은 김애란의 새로운 면모도 발견케 만드는 작품이다. 학창 시절 그는 축제에서 춤을 추려고 오디션을 봤다가 낙방했다고 한다. 동료 작가 시상식에서 읽은 축사엔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 하는 욕심이 희미하게 묻어난다. 소설에서는 감지할 수 없던 지점들이다.

얼마나 이 작가가 예민한 감각으로 문장을 쓰고, 진지한 마음으로 문학을 대하는지 가늠케 하는 글도 만날 수 있다. 가령 김애란은 2014년 한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두보의 ‘곡강’에 나오는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나니”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두보의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김애란은 사범대에 가라는 어머니 뜻을 거역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해 작가의 꿈을 키웠다. 만약 사범대에 진학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한예종 진학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무모하게 시도했던 것”이라며 “교사가 됐더라도 글쓰기의 욕구는 품고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소설가 가운데 좋은 산문을 쓰는 작가를 묻는 부탁엔 김연수를 꼽았다. “에둘러서 본론에 들어가는데, 우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지점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김애란은 현재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 전작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을 내놓은 게 2011년이었으니 오랜만에 발표하는 장편이 될 것이다. 어떤 작품인지 묻자 김애란은 특유의 열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떤 소설이 될지 잘 모르겠어요. 숨기는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계속 헤매고 있거든요. 이제부터라도 속도를 내보려고 해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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