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돈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가난한 게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가난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의철아, 네가 정말 생각하는 비빌 언덕은 무엇이냐?”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교인이 많고 적음에 따라 네가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잘 살아야지.”
나의 목회는 그때부터 180도 변했다. 주님이 나의 도움이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주님만 믿고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힘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돈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믿음 없음과 관련된 문제였다.
2009년 보증금 2000만원에 월 450만원으로 인천 송도에서 가나안교회를 개척할 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송도국제도시에 돈도 사람도 아닌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시오.” 그때는 주님이 매달 역사하지 않으시면 문을 닫을 형편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정말 내 믿음만큼 돈을 주셨다. 주님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돈 믿고 일할래? 나를 믿고 일할래?”
하나님은 우리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다. 믿음은 그 하나님을 믿고 살고 일하는 것이다. 만약 목사나 성도가 돈을 믿고 살아간다면 불신자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건 위선이고 가식이다.
목회하며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교권이 장로나 성도들에게 넘어가면 교회는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과거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스럽고 영향력이 대단한 교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교회의 존재감이 미미하다. 수많은 교회가 후임 문제로 영권이 무너지고 있거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한국교회가 1세대 목사님들 같은 준비된 지도자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준비된 지도자를 세우지 못했을까. 그 원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세습이란 용어로 준비된 지도자의 영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둘째, 장로들이 ‘바지사장’ 같은 목사를 데려다 놓고 교권을 휘두르려 하기 때문이다. 셋째, 양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목사가 점점 사라지고 월급쟁이 목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본다.
사회는 둘째치고 교회조차 세습과 계승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민수기 3장에 보면 제사장은 레위족속 중에서 세우라고 했다. 즉, 제사장 가문에서 제사장을 세우라는 것이다.
성직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실인처럼 훈련돼야 한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개척을 하면 아들은 함께 땀을 흘린다. 그 외로움 고통 아픔을 다 보고 자란다.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고 얼마나 헌신해야 하는지 보고 자란다.
하지만 교회에 공헌한 바도 없고 교회 출신도 아니며 교회에 대한 애정이 적은 목회자가 외부에서 들어오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후임자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고 전임 목회자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사다. 그 과정에서 성도들은 고통을 당한다. 갈등이 조장되다 보면 교역자가 바뀌고 교회가 반 토막 난다.
교회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희생과 헌신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존재다.
교회 후임은 그 교회를 가장 사랑하며 교회의 영성을 이어 갈 수 있고 성도들을 개척자의 가슴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아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아들은 안되고 남이어야 한다는 논리 속엔 잘못된 인본주의적 사고가 깔려있다.
세습은 자신의 권력욕과 일신의 배부름을 위해 주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일가나 두고 하는 말이다. 목회는 죽는 것이고 희생이다. 누가 그 교회를 가장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목회자의 아들이 사명감이 없거나 준비되지 않으면 절대 세워선 안 된다. 그런데도 후임으로 세운다면 세습이 맞다. 그러나 아들이 잘 훈련되고 준비된다면 영적 시각에서 리더십 계승이라 할 수 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