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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삶의 구원이라고?… 환상을 깨부숴라

여행 마니아들 사이에서 ‘환타’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전명윤씨. 아시아 지역을 주로 여행하는 그는 “대한민국의 133배나 되는 거대한 지역을 일터로,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 대해 아는 체하며 살고 있다”며 “여행을 할수록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의 목록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사계절 제공




여행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떠도는 미신 같은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그것은 힘들고 짜증나는 일상에서 당신을 구해줄 한 줄기 빛이다. 이른바 ‘여행 구원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당신이 지금 우울한 건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서다. 당장 배낭을 걸머지고 집을 나서면 모든 게 달라진다. 저자 역시 한때는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같이 말하곤 했다. “다 때려치워. 별거 아니야. 귀국행 비행기표를 쭉 찢으면 그때부터 시작이야. 새 세상이 열리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자의 생각은 달라졌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조언한다. “여행하는 삶이란 여행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오는 삶”이라고 말이다.

여행 작가를 부러워하는 이들에겐 찬물을 끼얹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저자 전명윤(46)은 여행 마니아들 사이에선 유명 인사다. 그는 ‘환타’라는 필명으로 이름이 알려진 가이드북 작가로, ‘환타(幻打)’는 ‘환상을 깨다’라는 뜻. 그는 1996년 실연을 당하고 떠난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아시아 곳곳을 돌아다녔고, “여행지의 속살을 자꾸 후비는” 가이드북으로 화제가 됐다. 저자는 “여행은 기쁨만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환타지 없는 여행’은 전명윤이 펴낸 두 번째 여행 에세이다. 스스로 “가이드북 깎는 노인”으로 남고 싶다는 저자는 가이드북 작가로 살면서 느낀 ‘가이드북 세계’의 허술한 실태를 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이드북에 때론 얼마나 엉터리 정보가 담기는지, 당최 무슨 잣대로 선별했을지 모를 여행지 랭킹을 나열하는 식의 가이드북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지적한다. 론리 플래닛 같은 일급의 가이드북도 도마에 올린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이런 대목이다.

예컨대 가이드북 두 권 A, B가 있다고 하자. A는 여행지 설명이 꼼꼼하진 못하지만 사진을 큼지막하게 넣고 시원하게 편집한 책이다. B는 상대적으로 정보량이 많다. 상식적으로 독자는 B를 택할 것 같지만 A를 구입하곤 한다. “시원시원한 A의 편집이 눈에 더 잘 띄고 커다란 사진이 여행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여서다. 출판사나 가이드북 작가로서도 A가 안전하다. 여행지 정보망을 느슨하게 짜면 “오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 C에서 D로 가는 버스의 배차 시간, 배차 간격, 요금을 일일이 적지 않고 “C에서 D로 가려면 버스를 타시라”고 써버리면 편하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전하면서 자신은 두툼한 가이드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떳떳하게 취재하고, 업체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공정하게 분별하고, 침묵은 금이라고 말하지 않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환타라는 이름을 짓고 강호를 누빈 지 어느덧 16년. 나에 대한 평가가 ‘재수 없고, 잘난 척하며, 싸가지 없다’ 단 세 마디라는 데 만족한다. 내가 이 분야의 직업윤리를 훼손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는 1년 내내 여행을 꿈꾸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달력에 소중하게 그려놓은 빨간색 동그라미를 보며 사방에서 몰아치는 갑질을 견뎌내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단 사나흘의 시간을 담보로 내 지갑을 두둑하게 불릴 용기가 나에게는 아직 없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저자의 여행 철학이 담긴 대목이다. 그는 “(여행지의 풍경은) 점이 아니라 선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곳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썼는데, 부연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언제부턴가 여행은 점이 되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든 여행은 점으로만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각 점을 연결하는 선을 불편해하거나 의미 없는 군더더기라고 여기는 것 같다. 선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단축했는지가 좋은 여행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세상에는 길이라고 부르는 가느다란 선을 따라 인간과 동물, 그리고 물류가 이동한다. 길의 고비마다 점으로 된 마을과 도시가 있고, 그곳에서 며칠 쉬며 주변을 둘러보다 또 길을 따라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여행이다. 세계여행을 하는 시대라지만 결국 우리가 딛는 곳은 선과 점이 연결된 세상이며, 우리는 그 가느다란 이어짐을 면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여행 작가의 에세이라고 하면 알록달록한 글만 한가득 담겼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엔 이렇듯 묵직한 메시지가 곳곳에 녹아 있다. 길 위의 삶을 살면서 마주한 세계의 그늘을 하나씩 살핀 대목은 선득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런저런 음식을 둘러싼 진귀한 이야기는 책의 재미를 끌어올리는 요소다. 독자에게 여행의 새로운 ‘환타지’를 제공하는 책일 수도 있겠다.

20년 넘게 지구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저자가 배운 건 다른 나라의 삶이 “당신과 내가 사는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말미에 등장하는 이런 문구는 묘한 울림을 선사한다. 저자는 “천국이나 이상향 따위는 없다”며 “모든 나라의 백성과 시민은 자신들이 지난 시대와 싸워 쟁취한 만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적어놓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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