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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독립군에 연패한 일제, 간도 기독교인 마을 36명 ‘두 번 학살’

중국 지린성 룽징시 동청융진 런화촌에 있는 장암동 참변 유적지를 지난 7월 4일 찾았다. 1920년 10월 30일 일제 토벌군은 조선인 기독교 마을인 이곳에 난입해 40대 이상 남성 36명을 예배당에 몰아 넣고 불에 태워 죽였다. 옛 예배당 자리에서 800m 떨어진 지점에 묘소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비석에 새겨진 문구.


마을 입구의 한글 표지판.


1919년 3월 13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의 만세 시위를 필두로 만주 전역에서 독립 시위와 무장 투쟁이 본격화된다. 일본은 이듬해인 1920년 만주 일대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한반도에 주둔하던 제19사단을 토벌대로 투입한다.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은 그해 6월 두만강 기슭인 봉오동에서 이들과 맞서 15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에는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부대가 연합해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일제의 잔혹한 보복이 이어졌는데 대표적 사례가 10월 말 벌어진 ‘장암동 참변’이다. 일제 토벌군은 40대 이상의 기독인 남성 36명을 포승줄에 묶어 예배당에 몰아넣고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살해했다. 참변 며칠 후 부락에 다시 침입한 일본 군경은 가묘를 파헤쳐 타다 만 시체를 전부 꺼내 숯이 되고 재가 되도록 완전히 태워 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 벌인 ‘이중학살’로, 1919년 3·1운동 이후 경기도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예배당을 대상으로 했고 선교사가 참상을 보고해 알려진 점도 흡사하다.

장암동 참변 유적지는 룽징에서 동북쪽으로 10㎞ 떨어진 야산에 있다. 지금의 지명은 지린성 룽징시 동청융진 런화촌이다. 마을 입구엔 ‘노루골’이란 한글 비석이 세워져 있다. 100년 전에도 조선인 부락 ‘노루바위골’로 불렸으며 여기서 노루 장(獐)에 바위 암(岩)을 합친 장암동 지명이 생겨났다. 마을 정자에서 만난 75세의 조선족 노인은 참변이 일어난 교회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1946년 중국 공산당 집권과 1960~70년대 외래종교 말살을 외친 문화대혁명을 거쳤기에 중국에서 과거 한인 교회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전부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 부락에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진흙탕 길을 헤치고 야산을 올라야만 ‘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를 만난다. 인적이 끊겨 적막한 언덕의 철제 담장 안에 묘소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99년 조선족 동포들이 설립한 ‘룡정시 3·13 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 정비했다. 최근갑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은 2011년 발간한 회고록 ‘시련의 열매’에서 “장암동 이중학살에서 살해된 김경삼씨의 차남 김기주라는 분이 은진중학교 18회인데 1994년 력사자료를 가지고 찾아와 유적지를 찾자고 했다”면서 “옛 교회당 자리를 확인했으나 그곳은 너무 편벽한 오지여서 서북쪽 800m 지점에 비석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이후 몇 차례 정비를 거친 비석엔 “일본 침략군은 경신년 대참안을 벌릴 때인 1920년 10월말 이곳에서 무고한 청장년 36명을 이중학살하여 천고에 용서받지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고 새겨져 있다. 장암동 주민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일본군 진주 당시 10~30대 청년들은 피신했으며 여성과 어린이, 노인을 뺀 40대 이상 남성 가운데 36명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룽징에 파송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WR 푸트(Foote) 선교사는 수기를 통해 “벌써 죽어버린 시체를 촌인을 시켜 한쪽에 모아 놓고 그 시체에 연료를 덮어 불을 질러 재를 만들어 버렸다”고 기록했다.

최 회장은 이 무렵 상하이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이 보고한 10~11월 집계를 인용해 피살 3664명, 체포 155명, 민가 3520채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가 불에 탔다고 설명했다.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으로 불린다. 춘원 이광수는 경신참변 관련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불쌍한 간도 동포들/ 삼천 명이나 죽고/ 수십 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양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치운 겨울에/ 어떻게나 살아들 가나”라고 썼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참변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1921년 1월 당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가 단신으로 룽징에 잠입한다. 장 기자는 앞서 동아시아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만나러 중국 베이징으로 파견돼 임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다. 장 기자는 룽징 일대의 군경 활동에 대한 탐문을 시작하는 한편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찾아가 토벌의 진상을 따져 물었다. 일본영사관은 무고한 양민을 살해한 바 없다고 발뺌하며 직접 조사를 제안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 군마와 함께 방한외투와 군모, 방한화를 준비한 일본 군경은 군복으로 갈아입은 장 기자와 함께 얼어붙은 해란강을 넘어 산모퉁이를 돌아갔는데 그게 장 기자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제재를 받아 정간된 상태였다. 장 기자는 보도할 지면이 없는 상태에서도 목숨을 걸고 동포들의 참변을 알리려 취재에 나섰다가 실종됐다.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념메달 제작 때 뒷면에 한국의 순직 기자 1호인 장 기자의 얼굴을 새겨 넣어 그를 기렸다.

룽징=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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