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니까.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니?”
계속해서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데도 아이는 전봇대처럼 서 있었습니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그날의 기억은 아이를 여전히 사로잡은 듯합니다. 그날은 유난히 날이 맑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뒷동산에 올라 걷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나는 그날의 소녀가 된 기분으로 은혜의 초장에 나갈 단장을 하고 언제나처럼 그 건널목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나는 아들이 서 있었습니다. 아직 신호등 나라의 사람은 빨간 옷을 입고 있어서 아들에게 거기 서 있으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아이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서는 환하게 웃으며 저를 향해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초록불이 들어오고 언제나 즐겨 보았던 아들과의 재회는 반전되고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 트럭이 멈춰 섰습니다. 그날만큼 빨리 달려본 적이 없습니다. 트럭 바퀴는 넘어진 아이의 손을 짓누르고, 엄마를 보여주겠다며 손에 들고 있던 사탕 꽃다발은 만신창이가 되어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이후로 아이는 건널목을 두려워했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아이를 향해 웃으며 불러도 아이의 얼굴에는 비가 내립니다. 아이 마음속의 달력은 그날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이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이 현재를 살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 사랑하고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친구들의 따돌림,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인생 속의 다양한 사건들은 실에 묶인 연처럼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발걸음을 사로잡아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2000여년 전 갈릴리바다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바다를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별의 시를 읊고, 익숙한 손길로 물고기를 낚던 어부. 한때 그의 매일은 즐거운 추억과 같았지만 지금 베드로의 배경 음악은 진혼곡입니다.
빈 배, 빈 그물,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뭍에서 그물을 정리하던 베드로에게 인자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세요!” 베드로는 마음의 볼륨을 줄이고 앞에 서 있는 그 청년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공허감을 채워주던 그 바다에 그물을 내리니 어젯밤에 별을 바라보며 꿈꾸던 물고기가 가득합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용하리라!” 그날 이후 베드로는 공허감의 건널목을 건너 불가능의 바다를 걷는 인생, 영혼을 속박에서 건져내는 인생, 자유롭게 날아 내 아버지 지붕에 앉는 한 마리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임마누엘 예수는 우리네 인생으로 찾아오십니다. 파란 신호등이 들어왔는데도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인생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주님이 선포하시는 평강은 잠시 잠깐 지나가는 마음의 편안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 평강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나의 영혼이 연결되는 역사입니다. 나는 얽매인 채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오히려 나는 자유롭게 은혜의 하늘을 나는 한 마리 나비임을, 인생이라는 가시밭에 피어있는 예수의 꽃에서 은혜의 생수를 맛보며 만끽하는 인생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린아이였던 아들은 이제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건널목에 넘어져서 피 흘리던 손에는 이제 흔적도 없습니다. 오늘도 아들을 닮은 손녀는 건널목에 서서 똑같이 서 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합니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함께 걸으면 즐거운 일이 가득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는 당신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는 머무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는 내 절망의 건너편이 아니라 오늘 그 사랑의 손으로 붙드시고 내 곁에 계심을. 그 주님을 믿고 앞으로 나가면 은혜를 향해 나를 수 있음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는 곳마다 평강과 복의 꽃이 피어있다는 사실을. 아바 아버지의 임재는 언제나 함께한다는 변치 않는 진리가 있음을.
“사방에 사망이 나를 두르고 사탄이 화살을 겨누어도
나 앞으로 걷는 근거는.
그리운 주님 환하게 웃으며 손 흔드는 그 광경이
감격에 겨워서입니다.”(전담양의 시 ‘인생의 건널목에서’)
전담양 목사<고양 임마누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