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1940년대. 장소는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 오랑. 그 아침 의사 리유는 특별한 생각 없이 죽은 쥐를 발로 밀어 치우고 층계를 내려왔으나 같은 날 저녁, 그는 다시 건물 복도에서 큰 쥐 한 마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 도시 곳곳에서 쥐들이 떼를 지어 거리로 나와 죽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늘어났다. 4월 28일 단 하루 만에 약 8000마리의 죽은 쥐가 수거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뒤에야 죽은 쥐의 수는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대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열이 나고 종기가 나고 구토를 하고 전신에 검은 반점이 돋고 멍울이 생겼다가 곪기 시작해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마침내 죽는 사람들. 의사 리유는 이 도시를 점령한 전염병이 ‘페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무시무시한 병.
‘2019년 9월 16일 오후 6시 무렵, 파주의 한 양돈농장 관리인이 죽어 있는 어미돼지 5마리를 발견했다.’ 다음날 관리인은 농림축산식품부에 이 사실을 신고했고, 농림축산검역본부의 정밀검사 결과 죽은 어미돼지 5마리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양성으로 확진됐다. 열과 설사, 구토 증상이 나타나고 배와 사지, 귀 등에 피부 출혈이나 붉은 반점이 생기며 한기를 느낀 돼지들이 서로 모여 있다가 허우적거리며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는 그 병이 이 땅의 돼지들에게도 닥친 것이다.
누나가 책장을 뒤져 오래된 책을 꺼내어 읽어준 덕분에 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를 아는 강아지가 되었다. 지금 한반도 파주와 연천, 김포, 강화 등지에서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 뉴스 때문에 나는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단어를 알게 되었다. 처음 발생 농가와 인근 농장에서 기르던 3950마리에 대한 살처분 조치가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한 달여 동안 살처분된 돼지는 얼마나 될까. DMZ에서 발견된 야생 멧돼지 사체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어 야생 멧돼지에 대한 총기 포획도 이루어진다니,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멧돼지들은 또 얼마나 많이 죽음을 맞게 되는 걸까. 이 땅의 돼지들은 끝끝내 이 열병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매년 종합백신을 맞고 한 달에 한 번 심장사상충과 외부기생충 약을 먹고 바르며 집 안에서 사는 나로서는 아무런 것도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70여년 전 알베르 카뮈라는 소설가가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우울한 투쟁’에 대해 썼듯이, 이 땅의 돼지들이 맞는 죽음과의 투쟁은 누가 추적하고 기록해줄 것인가. 시가 폐쇄된 이후에도 오랑의 시민들 대부분이 자기들의 습관을 방해하거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만 민감했던 것처럼,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고깃값에만 관심을 가질 때 목숨 붙은 것들의 죽음과 이별에 대해 말해줄 자는 누구인가.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아, 이 말은 준비 없이 불어닥친 불행에 대결할 아무런 힘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가엾은 돼지들이 아니라, 인간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