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의 주인공은 붉고 노랗게 색조 화장을 짙게 한 단풍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바람 따라 은빛 물결처럼 일렁이는 억새도 은은한 가을 정취를 온전히 느끼게 해준다. 특히 노을이 질 때면 금빛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며 여행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가을 억새로 이름을 날리는 명소 몇 곳을 추천한다.
정선 민둥산 … 물결치는 황금빛 바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에 위치한 민둥산(1118.8m)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억새 여행지다. 산행은 일반적으로 증산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한다. 경사가 완만한 3.2㎞와 가파른 2.6㎞ 중에 택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2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능전마을에서 발구덕마을을 거쳐 올라갈 수도 있다.
7부 능선을 지나 멀리 정상을 바라보는 지점부터 하이라이트다.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든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억새의 바다가 펼쳐진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한낮의 억새가 만추의 서정을 전한다면, 황금빛으로 물든 해 질 녘 억새는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지난달 27일 시작된 민둥산 억새꽃 축제가 다음달 10일까지 이어진다.
광주 무등산 … 고개와 능선의 하얀 군무
빛고을 광주를 품은 ‘어머니의 산’인 무등산엔 가을이면 어머니 가슴처럼 따사로운 능선에 억새가 핀다. 무등산국립공원 억새 산행은 오르는 길, 고개, 능선에 따라 다채롭다. 장불재 일대는 억새 향연의 주 무대이며, 중머리재와 중봉, 백마능선, 꼬막재 등에서 억새의 군무가 펼쳐진다.
다음 달 2일 무등산 정상을 개방한다. 서석대에서 평소에는 탐방객이 갈 수 없는 정상 3봉(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으로 이어지는 0.9㎞ 구간에 펼쳐진 억새밭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많은 탐방객이 일시에 방문하고 있어 정상부 경관 및 생태계 복원을 위해 탐방예약제가 운영된다. 최대 탐방인원 7000명(인터넷 예약 5000명, 현장접수 2000명)으로 제한되며, 탐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다. 신분증은 필수다.
창녕 화왕산… 억새평원 솜이불 향연
경남 창녕의 진산 화왕산(756m)은 흔들리는 넓은 가슴에 속울음을 우는 억새를 품는다. 정상과 마주한 배바위 사이 약 18만5000㎡의 솜이불 같은 억새평원이 향연을 펼친다. 환상적인 억새꽃은 바람의 지휘에 따라 ‘억새쇼’를 연출한다. 그 사이를 걷노라면 억새 손길이 볼을 간질인다.
억새평원 경계면을 따라 가야시대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2.7㎞의 화왕산성이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 서면 창녕 읍내가 손에 잡힐 듯하고 황금빛을 띤 들판 너머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일교차가 큰 날 이른 아침 산 아래 분지 쪽에 안개가 깔리면 안개와 억새의 앙상블이 선경을 빚어낸다.
밀양 천황산·재약산… 억새밭 은빛추억
경남 밀양시 산내면 ‘영남 알프스’ 천황산은 얼음골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해 해발 1020m까지 10분 만에 오른 뒤 1시간∼1시간3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발품을 크게 팔지 않아도 돼 산행 경험이 적거나 체력에 자신이 없어도 어렵지 않게 은빛 억새를 즐길 수 있다.
케이블카 상부 탑승장에서 천황산(사자봉), 천황재, 재약산(수미봉), 사자평습지로 이어지는 능선에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운동화를 신고 걸어도 될 만큼 길이 좋고 오르막도 가파르지 않다. 등산로 양옆으로 솜털 같은 억새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은빛 물결처럼 반짝인다. 파란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는 억새를 보고 걷노라면 힘든 줄 모르고 정상에 닿는다.
천황산에서 천황재는 1㎞, 재약산은 1.8㎞다. 천황산에서 천황재, 재약산, 사자평습지로 이어지는 코스는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 3구간 사자평억새길의 하이라이트다. 천황재에서 재약산 가는 길은 다소 험하다. 사자평은 약 4㎢(120만평) 규모로 국내 최대 억새군락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초지를 만든 곳이다.
충주 비내섬… 남한강변 호젓한 정취
높은 산을 오르지 않고 쉽게 억새를 만나려면 충북 충주시 앙성면 비내섬으로 가면 된다. 파란 가을 하늘과 황홀한 억새, 고즈넉한 남한강과 어우러져 더없이 평화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2012년 걷고 싶은 ‘전국 녹색길 베스트 10’에 선정됐으며 인기 TV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졌다.
비내섬 앞에는 남한강 변을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비내길이 있다. 소박한 비내마을과 호젓한 논밭, 그림 같은 강변을 따라 걸은 뒤 앙성온천에서 몸을 녹여보자. 열심히 달려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비내섬은 군사훈련장이어서 통제되는 경우가 있다. 찾아가기 전에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글·사진=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