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을 그린 프라 안젤리코는 본명이 ‘지오반니’였으나 도미니코 수도사가 되면서 ‘기도 디 피에트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늘 청빈하고 겸손하며 신심이 깊어 성자와 같았기에 ‘천사 같은 수도자’라는 뜻의 ‘프라 안젤리코’로 불렸다. 어디서 그림을 배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 미사용 책의 삽화를 그리다가 제단화를 그리는 화가로 발전했을 것이다. 원근법, 색과 빛의 사용, 입체적 표현기법 등에서 시대를 앞선 뛰어난 화가였다.
그의 그림들은 예술적인 차원을 넘어 깊은 기도와 묵상의 열매임을 보여준다. 산상수훈은 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많은 대중을 앞에 놓고 설교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작품들도 있지만 안젤리코는 예수님께서 늘 따라다니는 제자들만 데리고 가까이서 조용하고 깊이 있게 가르치신 것으로 그렸다.
이런 정적인 상황으로 멋진 그림 장면을 만들기는 힘든데 안젤리코는 감동스럽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예수님과 제자들만 둘러앉기에 적당한 우묵한 장소로서 조용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나무 없이 단순한 바위산의 무미건조한 배경은 화려한 옷 색깔로 표현된 제자들의 개성과 잘 조화된다. 단순한 배경 속에 제자들의 절제된 태도는 전체적인 통일감을 자아내고 예수님을 부각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산상수훈은 팔복설교로 시작된다. 첫마디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신 축복이다. 이 설교를 종종 가난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거나,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구절에 집착해 겸손하지 않으면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곤 한다. 예수님은 헐벗고 굶주리며 압제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대중 설교를 시작하며 군중에 대한 연민부터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 대해 말한 첫 마디가 ‘불쌍하구나!’였다. 충고나 교리가 아닌 공감과 연민이다. 마태복음(5:3)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 하셨고 누가복음(6:20)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 하셨다. ‘심령’이 들어가거나 안 들어가거나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가난’이란 말은 비참할 정도로 부족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모든 일의 결정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혼자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세울 수 없어 고통받는 자이다.
재정적이든 심령으로든 오직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복을 주신 것이다. 나아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리고 목마른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셨다.(마 25:31~46)
그림을 보며 유독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깊은 관심이 가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과 평소에 깊은 교제를 나누던 안젤리코이기에 이런 은혜로운 그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중세의 평론가인 바사리도 그를 성인이자 화가라고 평했다.
산속에 오목하게 파인 깊은 산에서 주신 말씀은 그 내용도 깊을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져 볼수록 묵상이 우러나는 그림이다. 팔복 설교의 첫 마디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보셨다는 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제와 봉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의무이자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지표가 된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사랑을 공감하고 함께하는 열쇠가 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2)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1387~1455)=화가이자 수도사인 안젤리코는 설교자들의 수도원이라고 알려진 도미니코회의 일원이었다. 이 수도회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사용해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가르치는 성 도미니쿠스의 강령을 따랐다. 안젤리코는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그릴 때는 눈물을 흘리며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 종종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수태고지’ ‘성모의 대관식’ ‘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전창림 홍익대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