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8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냐고?” 광고 자막이 일제 전쟁범죄 피해자들을 폄하했다는 지적에 유니클로는 “루머일 뿐”이라고 했다. ‘80년도 더 된 일’이라고 의역한 부분이 강제징용과 위안부 동원이 이뤄졌던 1930년대 후반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작품에 대한 대중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다는 게 인터뷰 등을 통해 확인될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상업 광고는 예술 작품과 다르다. 제품기획 때부터 소비자들의 기호를 꼼꼼히 분석하는데 하물며 광고를 제작할 때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설사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논란 이후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슬그머니 광고만 내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자막이 의도와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 부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며 공식 사과를 하는 게 먼저였어야 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다시 불을 붙인 이번 논란은 기업의 위기 대응 매뉴얼에 ‘반면교사’ 사례로 수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무튼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징용 문제에 대한 아베 정부의 태도가 완고하고, 한국 내 반일 감정의 수위도 낮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되돌아보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원흉은 정치다.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내부 결속을 노린 카드로 수출 규제를 단행했고, 이 조치는 우리 안의 ‘부족본능’을 깨워냈다.
사실 반일감정은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표현까지 동원해 한국 대통령을 비방하는 북한보다 “30년 동안 일본을 얕볼 수 없을 정도로 이기고 싶다”는 일본 야구선수의 한마디에 우리 국민들은 더 분개했다.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추론이 등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몸속 유전자에 숨겨진 부족본능의 발로라는 해석에 가장 수긍이 갔다.
부족본능이라는 말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인사는 최근 ‘요설가’라는 비난까지 듣고 있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여러 강의에서 그는 우리가 일본에 유독 반감을 갖는 게 민족주의, 냉정하게 말하면 다른 종족을 껴안기 싫은 부족본능이 우리 유전자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사 이래 도구와 제도는 급속히 진화했지만 인간의 진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해 여전히 우리 안에 부족본능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를 이루고 세계화 과정이 시작된 게 불과 300년 전 일인데 그 몇 백배의 시간을 부족 단위로 살아왔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시대의 본능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얘기다. 유 이사장은 부족본능의 특징을 지도자를 향해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신을 경배하며, 이방인을 혐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문제는 이 부족본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다면 더 큰 재앙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성장, 고령화 등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는 한 세대 혹은 몇 년 후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듯 먼 옛날처럼 이제 다른 부족의 상황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아닌 세상이 됐다. 특히 환경문제 등 글로벌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지만 사고와 행동은 여전히 부족 차원에서만 이뤄진다면 인류, 더 크게는 지구라는 행성이 멸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부족본능은 ‘스포츠 한·일전’을 통해 적절히 발산됐었다. 하지만 현재의 집단적 부족본능의 발산은 어떤 극적인 상황이 없이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일본 정치인이 아닌 일본 국민들에 대해선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노력은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생각이 이 정도에 다다르니 우리 안의 부족본능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한 일본 정치꾼들이 더욱 원망스럽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