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교육부 사람들로부터 사석에서 이런 핀잔을 들은 적 있다. “이 기자, 입시 기사 쓸 때 주요 대학이란 표현 좀 빼. 그럼 다른 대학들은 주요하지 않다는 거야? 입시업체들이 쓰는 표현이야.” “수직적 대학 서열체제를 허물라는 기사를 쓰면서 주요 대학이란 서열 체제를 용인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모순 아니야?”
이런 힐난을 듣고 얼마 뒤 교육부 기자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언론사 후배와 비슷한 얘기를 나눴다. 그는 “선배, 주요 대학 말고 다른 표현 없을까요. 자꾸 턱턱 막히는 느낌이어서”라고 물어왔다. 잠시 대안을 토론했다. ‘서울 상위권 대학’이란 말을 먼저 제외했다. 대학 서열구조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학부모·학생 선호 대학’이 얼핏 괜찮아 보였는데 대학 서열화의 책임을 학생·학부모에게 떠넘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수도권 대학 중 인기학과를 보유한 대학과의 구분도 모호했고, 선호 대학 아니면 비선호 대학으로 읽히는데 말맛이 더 나빴다.
교육부는 어떤 표현을 쓸까. 대학 행정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관료라면 서울 주요 대학이나 서울 상위권 대학이란 표현을 피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2017년과 지난해 정시와 수시 비율 논쟁이 불거지자 언론은 각 대학이 발표하는 비율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대학들이 2020학년도와 2021학년도 비율을 내놓았을 때 “주요 대학의 정·수시 비율을 정리해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교육부 담당자는 “정부가 주요 대학을 공식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출입기자단이 관심 있는 대학의 명단을 알려주면 취합해 제공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기자단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 이름 15개를 정해 넘겼고, 교육부는 ‘출입기자단 요청 전형유형별 모집 현황’이란 이름으로 자료를 배포했다. 정부가 주요 대학을 공식 규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기사가 나가는 것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 수 있는 일화였다.
지난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 문 대통령은 대국민 메시지인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밝힌다. “입시의 영향력이 크고 경쟁이 몰려있는 ‘서울 상위권 대학’의 학생부종합전형 비중이 그 신뢰도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 “수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 ‘서울의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수시와 정시 비중의 지나친 불균형을 해소할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민망하게도 교육부 금기어들이 모두 언급돼 버렸다. ‘이른바’ 내지는 ‘소위’같은 완충적인 표현조차 없었다. 이제 정부로부터 정시 비중을 높이라는 요구를 받지 못한 대학은 ‘대통령 인증 비주요 대학’인 것인가. 정부 요청으로 정시 비중을 높인 대학들을 상위권 대학으로 대접해도 되는가. 이런 표현에 죄책감을 없애 준 대통령께 기자는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교육부는 ‘대통령 말씀’을 슬쩍 주워 담는다.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 뒤 배포된 교육부 공식 자료에선 ‘학생부종합전형·논술 전형의 쏠림 현상이 높은 서울 소재 대학’, 다른 문서에선 ‘서울 일부 대학’이라고 수정했다. 이렇게 고쳐 쓴 교육부 사람들이 “대통령 연설문을 쓴 무개념은 누구지” “왜 이런 표현이 걸러지지 않았지” “그대로 읽은 대통령은 또 어떻고”라고 투덜거렸을 말이 귀 언저리를 맴도는 듯하다.
2017년 대선 후보 TV 토론 장면이 또 떠오른다. 문재인정부가 교육 정책에서 헛발질할 때마다 소환되는 기억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수시 비중이 준다고 정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란 기괴한 주장으로 상대 후보의 넋을 빼놨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입시제도의 디테일을 모를 수 있고, 사람을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며 대충 넘어갔던 것 같다.
문재인정부가 등장하고 누더기였던 대입 제도가 더욱 너덜너덜해졌다. 수능 절대평가라는 담대한 대선 공약은 2017년과 지난해 학교 현장을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공론화란 이름으로 ‘하청-재하청’ 책임 떠넘기기가 이어지더니 정시 30%란 어정쩡한 결론을 내놨다. 그 여파로 고1~3학년은 각기 다른 입시 제도를 적용받게 됐다. 이번에는 측근 자녀 문제로 입시 제도가 도마에 오르자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는 주장에 귀 기울여라”는 대통령 말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주변에서 교육 정책을 조언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도경 사회부 차장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