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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균·임경섭의 같이 읽는 마음] 다른 곳에 있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저 사진에 담긴 라벤더는 산문집 ‘알리바이’의 시작을 알리는 식물이다. 책에 담긴 첫 문장은 이렇다. “삶은 어딘가에서 라벤더향으로 시작한다.” 알리바이는 소설가 안드레 애치먼이 펴낸 작품으로, 그의 산문집이 국내에 출간된 건 처음이다. 픽사베이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가수가 DJ를 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 연결이 된 적이 있다. 물론 방송을 타지는 못했다. 나는 라디오 작가와의 사전 통화에서 ‘아웃’되었다. 그날의 주제는 ‘중독’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덮어놓고 전화를 걸었는데, 몇 번의 시도 끝에 예상치 못하게(!) 신호가 걸리고 말았다.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 이야기해 달라’는 작가의 목소리 너머로 DJ가 방송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긴장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상하는 거요”라고 뱉어버렸다. 이렇다 할 취미도, 특기도 없었으므로 ‘중독’은커녕 나는 ‘하는’ 일 자체가 딱히 없었고, 가끔 멍하니 ‘딴생각’을 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라디오 작가는 ‘상상’이라는 단어에 솔깃해했다. 이번엔 질문을 바꿔, 구체적으로 어떤 상상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공상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DJ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왔지만, 닿을 수 없이 점점 멀어져갔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상상요.” 그건 사실이었다. 늘 벗어나고 싶어 했으니까. 내 방이 없는 좁은 집,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 매일 똑같은 날들의 반복으로 무기력을 학습하는 학교에서. 그러나 라디오 작가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원했고, 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다시 연락하겠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으이구, 와이키키 해변에서 선베드에 누워 과일주스를 마시는 상상 같은 걸 얘기했어야지.”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나를 보고, 그때까지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던 오빠가 답답하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알리바이’의 작가 안드레 애치먼이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그때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 건 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유년 시절에 “안전하고 행복하고 사랑받는 기분”을 들게 했던 라벤더향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다른 나(그림자 나)”를 좇는 일로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자기 고백을 담은 산문집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그해, 여름 손님’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책의 저자는 터키계 유대인이다. 그는 이집트의 불안정한 정세를 피해 가족과 함께 로마로 망명했는데, 로마에서 첫발을 내디딘 곳은 가난한 거리 클레리아가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그가 가족과 다시 그곳을 찾아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장면이 내겐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과거에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고 했던 상상이 이렇게 넓고 깊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부끄럽고 놀라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도착한 클레리아가에서 그 거리의 “지저분하고 성마른 환영”을 작가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 시절, 작가는 클레리아가와 자신 사이에 상상의 장막을 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책에 매달린다. 그리고 “바깥세상과 전혀 조응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클레리아가와 면한 방에서 작가는 D H 로런스의 도시, 도스토옙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외딴 강둑, 보들레르의 까탈스러운 파리, 워즈워스의 영국 등으로 떠난다. 그에게 책은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었고, 그곳에서의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문고판 책을 사기 위해 토요일마다 서점에 가면서 그는 마침내 로마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클레리아가가 그에게 상상의 장막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거리였던 것처럼 그가 사랑한 로마 역시 로마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끼워 넣은 필터였지만, 그는 “우리의 알리바이이자 가장 내밀한 삶의 보고인 이 장막이, 이 허구가 없다면, 우리는 그 무엇과 연결될 수도, 접촉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사랑하는 법 또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배웠다고 고백한다. 책 속에서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 남들이 읽으라고 한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사물에 드리운 장막을 통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그 책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이다.

다른 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내 삶을 아름답게 하는지 ‘알리바이’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기 전의 나에게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다.

<김필균·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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