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국민 대화’에 대한 청와대 사전 홍보는 ‘각본 없음’에 맞춰졌다. ‘사전 각본 없이 국민의 즉석 질문에 대통령이 답하는 타운홀 미팅 형식’ ‘프롬프터도 없고, 기탄없이 듣는 자리’. 예고대로 ‘각본 없는 100분’ 동안 문 대통령은 사전 조율 없이 국민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었다.
가까스로 질문 기회를 얻은 개별 참석자들의 사연엔 저마다 절실함이 있었다. 경청하는 대통령의 모습만으로도 위로받는 국민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작위적 연출이 없는 진솔한 대화라는 의도 자체는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의 대화’ 자리로는 적절하지 않은 형식이었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더 긴박한 국가적 의제에 대한 대통령 생각을 충실히 듣는 자리여야 했다. 한 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안보 현안, 대입 정시 확대 논란 등 교육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이 화를 어떻게 참는지에 대한 질문이나,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같은 고백이 그 귀한 시간을 채웠다. 질문은 중구난방으로 쏟아졌다. 진행자인 가수 배철수씨는 “이런 진행은 처음인데 3년은 늙은 것 같다”고 했다.
‘국민과의 대화’를 앞두고 탁현민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은 “대통령에게 궁금한 (점이 있는) 300명을 무작위로 뽑으면 그게 전체 국민과의 대화에 부합하는 걸까”라며 부정적 전망을 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탁현민이 옳았다.
대통령은 국민 의견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일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말한 것처럼 “퇴근길에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잔 나누는 대통령”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 무엇보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결정권자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 대부분은 대통령의 영향을 받는다. 한·미 관계 같은 안보 문제부터 아파트값 같은 민생 현안까지 대통령이 영향을 미친다. 그 모든 책임도 대통령이 떠안게 된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책상 위에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나무 푯말을 세워둔 것도 그만큼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엄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통령이 100분의 시간을 내 자기 생각을 밝히는 자리인 만큼 철저한 사전 준비와 각본이 필요했다. 이런 자리가 즉흥적으로 흘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전 조율을 한다고 다 ‘트루먼 쇼’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세트리스트(setlist·곡 목록)가 미리 알려지고, 예행연습을 여러 차례 한다고 콘서트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각본에 근거한 내용의 충실성이다. 국민과의 대화뿐 아니라 국정 전반이 그래야 한다.
안 그래도 보수 진영은 이 정부의 ‘즉흥성’을 의심하고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는 동맹인 미국과의 조율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됐고, 대입 정시 확대 결정도 관계 부처와 충분히 상의 없이 즉흥적으로 내려졌다는 비판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도 태국 방콕에서 예정에 없던 ‘즉석 환담’을 주도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순발력과 대담함을 강조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마저도 ‘즉흥 정치’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환담한 이후에도 양국 관계에 뚜렷한 개선은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문 대통령의 임기 후반기는 더욱 철저한 각본이 필요하다. 임기 전반기엔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지만, 후반기엔 그 어떤 대통령도 레임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지소미아 종료 이후에도 한·미·일 관계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는 각본이 있어야 하고, 수능 정시 확대가 사교육 시장 확대로 왜곡되지 않는 방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철저한 준비가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가능케 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될 수 있겠지만, 국정은 각본이 있어야 드라마가 된다.
임성수 정치부 차장 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