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적은 양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성이 많은 곳은 더욱 악한 곳으로, 선한 곳은 더욱 선한 곳으로 만들 힘이 있습니다.
내 이름은 ‘누룩’입니다. 히브리어로 ‘세오르’, 헬라어로 ‘쥐메’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죄, 잘못된 교훈, 이단 사설, 부패성 등을 말할 때 비유로 사용됩니다. 예수님도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11)라고 말씀하셨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외식적인 신앙, 겉모양만 있는 믿음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바울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며 잘못된 교훈이 교회를 해칠 수 있음을 염려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맛이 없고 단단해서 먹기에 힘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기념할 때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출 23: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너무나 긴급해 누룩을 넣어 빵이 부풀도록 기다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죽만 갖고 떠났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유월절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습니다.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후손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누룩을 통해 밀가루 전체가 부풀어 오르듯 소수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 땅에 천국이 확장돼 간다는 의미라고 목회자들은 해석합니다.
사람 속에는 선한 것에 끌리는 마음도 있고 악한 것에 끌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선인이냐 악인이냐는 자기 속에 있는 어느 힘에 더 이끌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룩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밀가루 반죽을 순식간에 부풀게 하듯이 내(누룩)가 있는 곳을 소리 없이 지옥이나 천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밀가루가 많이 있어도 누룩이 없으면 결코 빵이 될 수 없습니다. 삭고 삭아 부서지는, 죽고 죽어 발효되는 누룩 같은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누룩처럼 퍼져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킨다면 나는 ‘조용한 혁명가’가 아닐까요.
나는 묻고 싶습니다. 살아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남을 위해 누룩이 돼본 적이 있느냐고. 예수 믿고서도 나만 편하고 나만 성공하고 나만 축복받고 내 자식만 잘되기를 바란다면 누룩이 될 수 없습니다. 눈물로 누룩을, 두려움으로 누룩을, 고독으로 누룩을 만들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누룩이 돼줘야 합니다. 누룩을 의인화해 쓴 ‘누룩의 고백’이다.
경계해야 할 ‘누룩’
성경에서 누룩은 ‘팽창한다, 확장한다’는 개념으로서 좋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나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누룩은 구약에서 악과 인간의 유전적인 부패의 상징(출 12:15~20)으로 등장했다. 제물에 꿀(쾌락)과 누룩(부패)을 넣는 일은 금지(레 2:11, 10:12)됐다. 신약에서 누룩의 영적 의미는 영적으로 부패하거나 부패시킬 영향력이다.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신앙(마 23:13, 눅 12:11) 사두개인의 의심과 고의적인 무지(마 22:23, 29) 헤롯의 사악함과 정치적인 궤휼(마 22:16~21, 막 3:6) 등을 포함한다.
묵은 누룩은 내어 버려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나쁜 습성을 버리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증거가 없고 능력도 없이 그냥 종교생활만 하는 껍데기를 버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보다 사람을 훨씬 더 의식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무신전신(無神前神)이란 말을 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종교적 무늬만 있고 형식만 갖춘 외식 주의자란 의미일 것이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6~8)
하나님 나라의 특징 중 하나가 ‘역설’이다. 작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게 되고, 한때 강력했던 것은 보잘것없어진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여겨지고, 양 떼 전체가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목자의 부드러운 보살핌을 얻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다.
한 사람의 선한 ‘누룩’
종교개혁은 누룩과도 같은 한 사람,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열두 명뿐이었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어놓을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한 덩이의 빵 전체를 부풀리는 그 시대의 누룩이었다.
미국 월드비전 회장 리처드 스턴스는 저서 ‘구멍난 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룩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비전은 구원받은 사람들로 인해 지금 나타나는 세계 변화에 대한 비전이었다. 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돼야 하고, 빵 반죽 전체(사회 전체)를 부풀리는 ‘누룩’이 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가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에 섞이면 더 보이지 않는다.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고 빵이 돋보인다. 성경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 2:5)고 했다. 이 마음이 누룩처럼 퍼져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변화된 소수의 사람이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먼저 변화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마음속 깊은 내면의 세계부터 변화를 일으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소수를 통해 교회의 역사를 이뤄 오셨다. 누룩처럼 소수가 다수를 감당하는 능력자가 돼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서 누룩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란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오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가 어제 돌아가셨고, 오늘 아침 부활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전해지는 게 아니다. 직접 보여 줘야 한다. 사려 깊고 헌신된 시민들의 작은 무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제껏 세상을 바꾼 것은 모두 그들이었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