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리(안녕하세요).”
큰 눈을 가진 로즈(10·여)가 지난달 26일 박기철 경기도 용인 분당제일교회 목사에게 스와힐리어로 인사를 건넸다. 이날 박 목사는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스태프들과 함께 케냐 앙구라이에 있는 로즈네 집을 찾았다.
로즈 아버지는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로즈에겐 엄마 한나(37)와 여섯 남매가 든든한 버팀목이다. 가난은 일상이다. 감사한 건 “학교에 빠지면 안 된다”는 엄마의 지지다. 로즈는 아타바부리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장애가 있는 막냇동생을 돌보고 가족 식사까지 챙겨야 하는 고된 일상에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엄마의 응원이 있어서다. 엄마는 온 동네를 다니며 일을 하느라 살림은 로즈 몫이 됐다.
로즈에게 안부를 전한 박 목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살림을 다 하고 공부까지 하다니 우리는 불평할 게 없네요.”
마침 물 뜨러 갈 시간이 됐다고 했다. 박 목사가 먼저 물통을 집어 들며 말했다. “로즈야 물 뜨러 같이 가도 되겠니.”
로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솔길에 접어든 둘의 뒤를 닭과 병아리들이 졸졸 따랐다.
100m쯤 걸었을까. 우물이 있을 거로 기대했던 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빨래라도 한 것처럼 뿌연 물이 고여 있었다. 케냐 월드비전 직원인 톨레씨가 “우기가 시작되면서 생긴 웅덩이”라고 귀띔했다. 우물은 1㎞쯤 떨어져 있다.
박 목사가 한숨을 뱉었다. “허드렛물로도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디에 쓰려는 걸까요.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이 말은 영어와 스와힐리어 통역을 거쳐 로즈에게 전해졌다. 로즈의 짧은 대답이 다시 통역을 거쳐 박 목사에게 닿았다.
“요리에 쓴다고 합니다.” 박 목사의 눈에 슬픔이 스쳤다. “그렇구나. 우리 물 떠서 맛있는 점심 만들어 먹자.”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작은 컵으로 연거푸 물을 퍼 담았다. 물 앙금이 떠올라 웅덩이는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시멘트 가루를 풀어 놓은 것 같았다.
물통은 꽤 무거워 보였다. 로즈는 머리에 물통을 올렸다. “무거운데 머리에 이고도 잘 걷네요. 기특합니다.” 물통을 든 박 목사도 함께 걸었다.
로즈는 집 옆 작은 움막으로 박 목사를 안내했다. 주방이었다. 말이 주방이지 비바람도 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천장은 뚫려 있었다. 10살 소녀는 살림꾼이었다. 왼손에 카사바(케냐 고구마)를 들고 오른손에는 칼자루가 없는 무딘 칼날을 쥐고 순식간에 껍질을 벗겨냈다. 박 목사도 거들었지만 로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불도 붙였다. 모닥불 위에 올린 냄비에는 손질한 카사바를 담고 방금 떠온 물을 부었다. 20여분쯤 지났을까. 로즈는 가족들 앞에 냄비를 내려놨다. 큰 오빠 윌슨(15)이 세숫대야에 물을 부어 들고 왔다. 손을 씻기 위해서였다. 박 목사가 식사 기도를 한 뒤 삶은 카사바를 하나씩 들었다. 눈 깜짝할 새 식사가 끝났다.
박한영 월드비전 국제사업본부 대리는 “식사가 부실하다 보니 영양실조에 쉽게 걸린다”면서 “면밀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로즈네 가족은 이날부터 월드비전 후원 아동으로 선정됐다. 케냐 월드비전과 앙구라이 사업장 직원들은 엄마와 면담한 뒤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자세히 조사했다.
월드비전은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했다. 신발도 있었다. 박 목사는 다섯째 벤(6)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싶다고 했다. “벤, 신발 신기 전에 발부터 닦자.”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벤은 의자에 앉아 쑥스럽게 발을 내밀었다.
작은 발에는 상처가 많았다. 발을 잡자마자 박 목사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 “주님, 이 작은 발을 닦습니다. 이 아이가, 이 가족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복의 통로가 되게 해 주세요. 이 가정에 큰 축복을 주셔서 아이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세요.” 발을 다 닦은 박 목사가 다시 기도하자고 했다. 벤은 두 손을 펴 얼굴을 가렸다. 케냐 기독교인들은 보통 이렇게 기도한다.
박 목사는 어머니에게도 격려를 전했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의 꿈이 이뤄질 겁니다.”
로즈 가족이 사는 앙구라이는 우간다와 국경을 맞댄 도시로 5만6000여명이 살고 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는 300㎞쯤 떨어져 있는데, 비행기를 타고도 3시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한다.
앙구라이는 우간다와의 무역을 위한 물류 중심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로즈 가족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많다. 월드비전 케냐는 2006년 앙구라이 사업장을 열어 현재 3650명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식수 위생 사업도 함께 진행한다.
앙구라이(케냐)= 글·사진 장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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