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8시38분, 국회 본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이 “효율적인 회의 진행을 위하여 예산안부터 먼저 상정하여 심의하도록 하겠다”며 2020년도 예산안과 기금운용 계획안, 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BTL) 안을 상정했다. 통상 예산 부수 법안을 먼저 처리하는 관례와 달리 예산안부터 상정하자 자유한국당 의석에선 항의가 터져 나왔다. “예산 부수 법안부터 상정하라”로 시작한 고함은 어느새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구호로 변했다. “문희상은 사퇴하라” “앞잡이다” 등에 이어 느닷없이 “아들 공천”이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는 본회의장에서 듣게 되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구호였다.
그 짧은 구호 뒤에 생략돼 있는 이야기는 이렇다. 문 의장은 경기도 의정부갑에서 6선을 했고, 20대 국회를 끝으로 지역구를 떠날 예정이다. 21대 총선을 앞둔 지금, 지역구에 여럿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문석균 민주당 의정부갑 지역위원회 상임부위원장이다. 바로 6개월 전쯤 상임부위원장이 된 인물로, 문 의장의 아들이다. 한국당 의원들은 이런 이유로 문 의장이 아들 공천을 위해 예산안을 상정하며 민주당 편을 들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 의장은 느닷없는 구호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문 의장은 토론자로 나선 조경태 한국당 의원이 계속 침묵을 지키자 “제발 나를 봐서 토론 좀 해주세요”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본회의 산회 선언을 하지 못한 채 의사진행권을 주승용 부의장에게 넘기고 병원을 찾았다.
아무리 여야 간 극한 대립 상황이었다지만 이런 구호가 본회의장에서 울려 퍼지는 현상은 과연 괜찮은 걸까. 국회법 10조는 “의장은 국회를 대표하고 의사를 정리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무를 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회의장은 여야를 떠나 입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란 얘기다. 여야 간 입장이 아무리 달라도 국회의원 스스로 국회를 대표하는 의장을 마치 사적 이익을 위해 예산안 처리라는 국회의 핵심 업무를 맞바꾸는 사람 정도로 격하시키는 건, 의원들 스스로 국회 얼굴에 먹칠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그 구호는 전적으로 심증과 추측이다. 문 의장이 설령 마음속에 그런 의도가 있었을지 모른다 해도 그걸 본회의장에서 정치적 구호로 풀어내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한국당이 그날 보여준 행위를 거꾸로 한국당에 적용해보자면 이런 반박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지역구 공천 확보. 그날 가장 크게 목청 높여 구호를 외친 한국당의 비례의원이야말로 지역구 공천을 받고 싶어 그렇게 나섰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의장의 아들 공천 문제는 민주당이 풀어야 할 숙제인지는 몰라도 한국당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초’라는 작지만 단단한 책에서 정당 공천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공천이란 당이 고른 인물을 특정 후보로 지명하는 것이며, 공천의 가치는 당 전체가 그 공천을 지지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면서 한마디로 “정당의 공천은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민주당이 어떤 후보를 내기로 하느냐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신뢰할 만한 정당인지를 보여주는 과정이 곧 공천이란 얘기다. 논란이 커지면서 문 의장의 아들은 부친의 반대와 세습 논란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언론에 밝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세습 논란은 받아들인다”면서도 “아버지가 공격받은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아들의 정치적 소신 행보인지, 지역구 세습을 노린 꼼수인지는 국민이 곧 판가름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아들 공천. 그날 본회의장에 울려 퍼진 이 구호는 어떻게 기억될까. 주변에 물어보니 그 순간 ‘어떻게 국회의원들이 저렇게까지 하나?’ 민망한 생각을 했던 국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 국회법 25조 ‘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조항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기록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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