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매표소에서 카페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벽면 전체에 원색의 A4 용지가 벽보처럼 가득 붙여져 있다. 포스터인가 싶어 혹시 지나칠 수 있는 이것은 제니 홀저(69·사진)의 설치 작품이다. 제니 홀저는 지난 40여년간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해온 미국의 대표적인 개념 미술가다.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에 최초의 여성작가로 나가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바 있다.
제니 홀저가 국립현대미술관 커미션(작업비를 주고 주문 제작) 프로젝트로 최초의 한국어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복도에 붙은 1000장의 포스터는 각각 ‘경구들(1977-79)’과 ‘선동적 에세이(1977-82)’라는 기존의 두 연작 가운데서 작가가 고른 경구와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해 설치한 것이다. 흰색의 종이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가끔 어떤 일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계급구조는 플라스틱만큼이나 인위적이다….’ 문장을 읽다 보면 한국의 사회 상황이 연상이 된다. 글씨체는 그래픽디자이너 안상수씨가 맡았다. 경구들에서 뽑은 문장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석조 다리의 난간 상판에도 새겨 영구 설치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야말로 최초의 한글 신작도 나왔다. 서울관의 1,2층을 터서 층고를 높인 ‘서울박스’라 불리는 공간에 설치한 ‘당신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마치 작품을 목걸이처럼 천장에서 늘어뜨린 기념비적인 로봇 LED 사인이다. 길이 6.4m의 막대에는 시인 김혜순, 소설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쿠르드족 출신의 이라크 작가 겸 사회운동가 호진 아지즈, 재미 한인작가 에밀리 정민 윤 등 여성 작가 5인의 글이 전광판으로 시종 흐른다. 전쟁의 폭력, 정치적 억압, 세월호 참사 같은 정치적·사회적 비극을 전하며 공감과 치유, 소통과 회복을 촉구하는 공공미술이다.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흰 머리 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서 발췌한 한강의 시 ‘거울 저편의 겨울 11’의 문장들을 전시장에서 보는 경험은 낯설어서 거리의 구호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그런 작품에 ‘당신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전시 개막에 맞춰 최근 내한한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예술계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다”고 말했다.
높은 층고 덕분에 차별화된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인 서울박스는 대한항공의 후원으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간 서도호 등 국내외 작가 4명의 작품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하지만 후원이 중단되면서 그동안 비어 있었는데, 모처럼 이곳에서 전시가 이뤄진 것이다. 제니 홀저의 전시로 인해 전시공간으로서의 매력을 새삼 발하면서 서울박스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제2의 기업의 등장을 촉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시는 내년 7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