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승객 지친 하루 다독인 지하철 승무원의 ‘위로’
택배기사의 수레를 지켜준 아파트 주민들의 ‘배려’
택시 타고 불 끄러 달려가는 소방관에게 전해진 ‘응원’
분노가 들끓었던 2019년
평범한 이들이 공감의 힘을 보여주며 세상을 지탱했다
2020년도 그런 한 해이기를
지난해 6월 11일 오후 6시40분쯤이니 퇴근길 승객이 잔뜩 타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사당행 열차가 동작대교를 반쯤 건넜을 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음 역은 동작, 동작역입니다…” 하는 녹음된 음성 대신 승무원의 육성이 들렸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힘들고 지치고 속상한 게 있다면 열차에 모두 놓고 내리세요. 제가 다 싣고 가겠습니다.” 힘겨운 일상은 시간의 흐름도 왜곡해서 1년은 참 빨리 가는데 하루는 무척 길게 느껴진다. 그런 하루를 보낸 이들에게 얼굴 모를 승무원의 한마디는 가볍지 않았다. 그 열차에는 스물두 살 신모씨가 타고 있었다. 요즘 청년의 삶이 어떤지 우리는 안다. 차창 밖으로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다 방송을 들은 그는 전화를 꺼내 서울교통공사에 감사 문자를 보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지하철에서 울 뻔했다”는 글을 남겼다.
지난달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은 어느 아파트 게시판을 찍은 거였다. 관리사무소에서 “택배 배송 때 소음을 유발하는 수레 사용을 금지한다”고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이어진 사진 몇 장에는 안내문 위에 주민들이 써 붙인 포스트잇이 담겼다. “저는 괜찮던데요? 수레 소음 상관없습니다.” “10층은 수레 오케이. 계속 사용해주세요.” “1804호입니다. 배송하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저희도 괜찮습니다.” “초등 4학년이에요. 무거운 상자 들고 다니시면 힘들 것 같아요. 수레, 시끄럽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포스트잇은 늘어났고 나중엔 수레 금지 안내문을 뒤덮었다.
충북 청주의 택시기사는 지난해 4월 밤중에 젊은 남성을 태웠다. 속초로 가자기에 시외로 빠져나가는 동안 남자는 전화를 몇 통 했다. 부모와 또 여자친구와 통화하는 걸 들으니 그는 소방관이었다. 강원도에 큰불이 났을 때다. 본부에서 긴급 문자를 받았고 휴무지만 서둘러 합류하려 인사도 못 하고 간다고 했다. 당시 산불 현장에는 전국의 소방인력이 집결했다. 어둠을 뚫고 강원도로 줄지어 달려가는 소방차 행렬이 각지에서 목격됐는데, 이렇게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간 이도 있었다. 속초에 도착했을 때 택시기사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뿐”이라며 요금을 받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소방관을 “다치지나 말라”면서 떠밀 듯 내려주고 빈 차로 청주까지 돌아갔다.
세 이야기는 국민일보가 2019년 소개한 [아직 살 만한 세상] 기사 목록에 들어 있다. 세상이 살 만해질 수 있는 키워드가 하나씩 담겼지 싶다. 위로와 배려와 응원. [아직 살 만한 세상]의 사연들을 훑어가다 보면 세 단어를 거듭 마주하게 된다.
대입 수시 합격자 발표가 이어지던 지난달 8일 수험생 커뮤니티에 ‘우울한 상태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네가 읽으면 좋겠어’란 글이 올라왔다. 역시 수험생인 글쓴이는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충격이 생각보다 컸어… 그런데 내 생활기록부가 진짜 내 생활을 기록했는지 의문이 들더라. 거기 있는 게 진짜 나인지.” 지난해는 장관에 발탁된 이가 자녀의 수시 합격을 위해 불법과 편법을 동원했던 일로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 입시를 준비하느라 더 힘들었을 수험생들에게 그는 말했다. “버스에 먼저 오른 친구의 교통카드에 잔액이 없을 때 내 카드를 대며 ‘2명이요’ 말하는 우리의 배려와 센스 같은 것이 거기에는 담기지 않았더라고.” 생활기록부를 포장하려고 불법도 마다치 않는 세상이지만 그깟 생활기록부가 뭐냐고 이렇게 위로하는 누군가도 있다.
차 문을 열다가 옆 차에 흠집을 내는 ‘문콕’도 교통사고로 여겨지는 마당인데, 지난해 5월 21일 저녁 그 배달원은 아파트 주차장의 승용차에 긴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차창에 붙은 번호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배달 중 차 사이를 지나가다 선생님 차를 긁어서요. 죄송합니다. 변상해드리겠습니다.” 며칠 뒤 차주가 보내온 문자는 이랬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면 내일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변상은 됐고요, 더운 날 땀 흘리시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수고하세요.”
20대와 30대 청년이 지난달 울산지법 형사 법정에 섰다.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해 자살방조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불우한 가정사 등이 극단적 선택을 불렀다. 징역형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주문(主文)을 다 읽었는데 판결은 끝나지 않았다. 재판장은 준비해온 글을 꺼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일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들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판결은 위로이기도 했고 배려이기도 했으며 응원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해는 분노가 뉴스를 채웠다. 불공정에 분노하고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서로에게 분노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평범한 이들이 이렇게 위로하고 배려하고 응원하며 서로에게 공감했다. 분노는 정권도 무너뜨릴 폭발력을 가졌지만, 세상을 살 만하게 지탱하는 건 공감의 힘이다. 2020년도 분노할 일이 많을 텐데 우리의 공감력이 균형을 잡아준다면 아직 살 만할 것이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